2009년 작고한 장영희 박사의 수필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을 읽었다. 내용 중 남북 이산가족 상봉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젖먹이 막둥이 아들을 두고 남하한 아버지가 오십 년 만에 만났다. 나이 오십에 불과하지만 이가 모두 빠지고 깡말라서 자신보다 더 늙어 보이고 초라한 아들 손을 잡고 서럽게 울다가 북한 TV 기자가 카메라를 들이대자 갑자기 벌떡 일어나 “김정일 장군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오십 년 동안 아무것도 해줄 수 없던 막내아들에게 팔십 넘은 아버지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랑 표현이었다. 오매불망 고대했던 상봉이지만 삼십 년의 세월을 추월하여 자신보다 늙어버린 아들의 모습에 얼마나 가슴 아팠을 것인가? 만났다고 함께 살 수도 경제적 도움을 줄 형편도 안 되는 상황에 절망하던 아버지는 김정일 만세를 외쳤다. 그것이 어찌 본마음이기야 하겠나 마는 보는 이를 처연하게 했다.
아들은 또 얼마나 아버지를 원망했을 것인가? 길었던 모진 세월 끝에 만난 자신보다 젊어 보이는 아버지에게 서먹했으나 서럽게 울던 아버지의 돌발적 변신에 아연했을 것이다. 그 짧은 시간에 온갖 상념이 뒤엉키고 풀려 아버지에 대한 육친의 정을 느꼈을 것이다. 어쨌든 당시에는 김정일이 북한의 최고 권력자였으니 다시 못 볼 아들을 위하여 아부한 것이다.
함께하면 별 게 아닐 수도 있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각별하고 절박할 수 있다. 자기 일이 아니라고 타인의 일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행과 불행은 교대로 오게 마련이고 희로애락은 반복된다. 타인의 불운을 함께 아파하고 동정하며 자신의 행운을 발견하고 감사하는 지혜와 겸손한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한다.
2020. 6. 15.(월)
--- 「1부 제5화 아버지 마음」 중에서
조순남, 죽은 누나의 이름이다. 7대 독자인 아버지가 위로 큰아들을 두었지만 둘째 아들이 어려서 죽고 나서 생긴 첫 딸, 요즘에야 소중하고도 귀한 딸이지만 여자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던 당시 사회의 통념에다 7대 독자로서 아들을 간절하게 바라던 아버지로서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딸이어서 이름마저도 남자 이름을 붙여 주었다.
예전에는 동생이 남자가 태어나라고 순남이니 후남이니 하는 이름과 여자는 그만 태어나라고 말자니 말희니 끝순이니 말자니 말숙이니 하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가난한 형편이어서 모든 형제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집안일을 거들어야 했지만, 딸은 특히 더 심해서 대여섯 살부터 부엌일을 해야 했다. 누나나 여동생도 예외는 아니었다. 음식도 적게 그리고 나중에 먹어야 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중학교는 꿈도 꾸지 못했다. 큰 형님은 남자에다 장남이라고 중학교를 입학이라도 하였으나(결국은 졸업하지 못하고 돈 벌러 떠났다) 누나는 집안일을 도우면서 밤에는 시보리(일본 여자 옷감이 되는 무늬를 만드는 일)를 떠서 돈을 벌어야 했다.
내가 초등학교를 입학할 때 부모님은 일해야 하므로 누나가 이름표와 손수건을 가슴에 매주고 입학식에 데려갔다. 그리고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마 누나 나이는 열여섯이었을 게다. 돈을 벌기 위해서 서울로 떠났다. 명절 때나 내려오던 큰 형님과 누나는, 그러나 편안히 고향에 올 수 없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오면 돈 못 벌어온다고 야단치는 아버지가 계셨다. 부모의 사정이야 어떻든 형님이나 누나가 오면 당시로는 귀한 과자 같은 먹거리를 사 오기에 우리에게는 마냥 반가운 손님이었다.
도시라고는 백제문화제에 그림 그리기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부여읍에 두 번밖에 가 본 적이 없는 완전 깡 촌놈이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 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단칸방에 사는 누나가 촌놈들에게 서울을 구경시켜주기 위하여 초대한 것이다.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갈 수가 없었기에 당시에 큰 순서대로 둘째 형과 나만 서울에 갈 수 있었다.
처음 보는 서울의 건물과 거리와 사람들에게 완전 주눅이 들었지만, 너무나 신기한 것이 많아 즐겁고 신난 생활을 보냈다. 낮에는 만화방에서 만화를 빌려다 보고 누나가 퇴근한 후에 시내를 구경하였다. 하루는 퇴근길에 TV에서만 보았던 떠먹는 아이스크림 ‘투게더’를 사 왔다. 시골에서 브라보콘도 먹어보지 못했는데 비싼 떠먹는 아이스크림을 먹어보게 된 것이다. 너무 비싼 것이어서 황송한 마음으로 먹었지만 정말 맛있었다. 당시 돈으로 100원도 넘는 것이어서 정말 비싼 것이었다. 현재 돈으로 환산한다면 몇만 원쯤 할 것이다.
그렇게 좋은 추억을 남겨주고 누나는 다음 해 세상을 떠났다(차라리 추억이라도 남기지 말지). 순남이라는 이름이 촌스럽다고 순원이라고 바꾸면서까지 모진 운명에 맞서 처절하게 저항하였지만,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한 것이다. 그놈의 돈이 문제였다. 아버지는 돈을 벌어오라고 늘 성화였지만 당시 공순이 생활을 하면서 돈을 모으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아무리 작은 방이라도 월세를 내야 했고, 기초생활비를 제하면 모을 수 있는 돈은 거의 없었다.
물건의 품질이 아니라 순전히 가격 경쟁력으로 수출을 해야 했던 70년대의 노동 현실에서 근로자의 생활은 열악한 것이었다. 당시 스무 살이었던 누나에게 부모님의 돈 독촉만 문제가 아니었다. 가난하고 학력이 짧은 누나였지만 사람이었기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유유상종이라고 아마 상대 남성도 가난한 공돌이였던 모양이다. 비슷한 사람끼리 비슷한 고민을 하면서 사랑을 키웠지만, 현실을 극복하기에는 너무 여리고 세상이 각박하였던 듯하다. 결국, 양가 부모한테 결혼한다는 말도 꺼내지 못하고, 어느 겨울날 둘이 연탄가스를 피워놓고 이 세상을 하직했다.
부모가 아무리 돈을 요구하고, 세상이 아무리 냉대하더라도 독하게 살아야 하는 것을, 세상만큼 모질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거의 기절할 만큼이나, 까무러치듯 몸부림치며 우시는 어머님을 보면서(당연히 나도 많이 울었다. 너무 가슴이 아팠다. 돈 때문에 죽다니…….) 어떤 일이 있더라도 어머니보다 먼저 죽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남자 형제보다 훨씬 더 열심히 살아가는 아내나 여동생을 보면 커다란 눈망울의 죽은 누나 생각이 간절해진다. 물론 살아 있으면 여러 복잡한 문제로 고통스럽게 살아가겠지만, 나한테는 아주 따뜻한 마음을 주는 소중한 누나일 터인데…….
자식에게 가장 큰 행운은 다 자랄 때까지 부모가 생존하는 것이며, 부모에 대한 가장 큰 효도는 자식이 건강하게 성장하고 부모보다 먼저 죽지 않는 것이다. 자식을 위해서도 부모를 위해서도 아무리 주어진 현실이 부담되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참고 견디어 낼 일이다. 결코, 운명의 칼날에 쓰러져서는 안 된다.
2013. 10. 25.(금)
--- 「2부 제2화 누나」 중에서
세월이 흘러 어느 날
문득 생의 종착역이 다가왔다고 느꼈을 때
지나온 날들을 돌이켜보리라.
만나서 함께 했던 사람들,
만나서 즐겁고 행복했던 사람들과
만나서 고통스럽고 고단했던 사람들과
나에게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과
내가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과
이미 떠난 사람들과
아직도 살아 있는 사람들과
기억에 남는 사람들을 헤아려 보리라.
기억에 남는 순간들,
전율적인 감동을 하였던 순간과
무아지경에 이르는 오르가슴이나 엑스터시나 카타르시스의 순간과
잔잔한 미소를 짓게 하는 아름다운 순간과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과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던 순간과
문제해결을 위해 번뇌하던 순간을
영상으로 그려보리라.
내 발길이 미쳤던 곳들,
처음 태어나 세상을 접했던 고향 부여와,
처음으로 독립적인 생활을 했던 구미와
처음으로 군 생활을 맛보았던 광주와
진정한 의미로 군을 이해할 수 있었던 계룡과
마음껏 이상을 펼쳤던 충주, 진주, 예천, 서산, 사천과
의외로 만만찮은 세월을 보내야 했던 김해와
많은 산과 강과 바다와
앞으로 가게 될 많은 아름다운 장소를
점점이 회상하고 상상하리라.
그리고 나에게 위로와 축하를 건네리라.
쉽지 않은 삶의 역경을 슬기롭게 극복하여 만든
너의 삶은 훌륭하였다고.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한 결과였다고.
행복한 마음으로 종착역에 다가가리라.
그리고 미소 지으며 눈을 감으리라.
행복한 마무리를 위하여
결코, 후회할 말과 행동은 하지 않으리라!
2012. 7. 29.(일)
--- 「5부 제1화 행복한 마무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