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쓰다’란 중의적 표현을 좋아한다. 보통 우리는 ‘쓰다’란 표현을 글을 쓰는 것으로 사용한다. 그런데, 알다시피 또 다른 뜻이 있다. 가면을 ‘쓰다’라는 뜻도 있고, 맛이 ‘쓰다’란 말도 있다. 물건을 ‘쓰다’라고도 할 수 있으며, 돈을 ‘쓰다’, 신경을 ‘쓰다’란 말도 있다. 재밌는 건, 이러한 중의적 표현이 모두 연관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아래와 같이 표현할 때 그렇다.
나는 글을 ‘쓰는’ 작가란 가면을 ‘쓰고’ 있다. 나의 다른 가면만 알고 있는 어떤 이들은 글을 ‘쓰는’ 나를 공격하며 신경을 ‘쓰게’ 만든다. 내 편인 줄 알았던 사람들의 배신이랄까. 나는 인생이 ‘쓰다’는 걸 느낀다.
---「제 2부 ‘써보면 달라지는 것들’」중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평범함이 지속되는 나날이었다. 나는 이 평범함을 얻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는가. 어렸을 때 그저 그렇게 생각했던 ‘보통’과 ‘평범’이라는 단어가, 이리도 쟁취하기 어려운 것이었다니. 아등바등 치열하게 살았는데 보통 이상의 것을 얻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그나마 어느 정도 평범함의 범주에 들었다는 안도 속에서 보내던 하루하루. '나, 제대로 살고 있는 걸까?' 결국, 이 묵직한 질문을 맞이하고 말았다.
---「머리말 ‘평범한 직장인은 왜 글을 쓰기 시작했을까?’」중에서
글은 내가 쓰는 나다. 글은 내가 쓴다.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써 내려가는 ‘나’인 것이다. 나의 경험이나 생각, 상상이나 감정은 내가 써 내려갈 때에야 온전하다. 온전한 글은 온기가 있고 힘이 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삶을 살 수 없다. 그러니 결국 내 것에 대해 쓰는 것이다. 나를 관통하는 글쓰기는 그래서 필요하다. 우리는 다른 누군가를 관통할 수 없다. 글쓰기를 하고 나서야 긴 시간이 흘러, 나는 그것을 깨달았다.
---「제 2부 ‘내가 선택한 단어들’」중에서
글쓰기는 시간의 불가역적 성질을 거스를 줄 안다.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글이 완성되는 건 아니고, 썼던 글을 지울 수도 있다. 그리고 남겨진 글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오가며 읽는 사람의 마음을 건드린다. 과거에 쓴 글이라도 현재나 미래에 영향을 줄 수 있고, 지금 쓰는 글이 과거의 기억을 왜곡할 수도 있다. 어쩐지 글쓰기 앞에선 시간도 속수무책이란 생각까지 든다. 때문에 나는 가끔 글쓰기를 통해 통쾌함을 느낀다. 만날 시간에 당해만 왔으니, 그것을 거스를 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제 2부 ‘시간을 거스르는 글쓰기’」중에서
살다 보면 마음이 많이 상한다. 상한 마음은 인생을 슬프게 한다. 슬픈 인생은 개개인의 우주에 대한 평화가 사라진 상태를 말한다. 아무리 햇살이 쨍쨍하게 비추어도, 나는 상관없는 것이다. 이미 내 우주에 드리워진 어둠에 한낱 저 하늘의 햇살은 개입을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살아가기 위해선 슬픔을 어떻게든 가누어야 해서, 다양한 방법이 동원된다. 술을 마시거나, 달달한 것을 먹거나. 무언가를 ‘플렉스’하거나 여행을 가기도 한다. 그러다 결국 깨닫는 건, 당장은 슬픔을 잊을 수 있겠지만 본원적인 상처나 슬픔은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글쓰기를 시작하고 나서는 마음의 얼룩을 좀 더 잘 다루게 되었다. 위에서 말한 마음의 슬픔을 다루는 방법은 표면적이면서 그 중심엔 내가 없는 처방인데, 글쓰기는 확연히 다르다. 글쓰기는 ‘시간’이라는 속성을 수반함과 동시에 ‘나’라는 본질적인 위로의 대상을 소환하기 때문이다.
---「제 1부 ‘글쓰기는 얼룩을 지워내는 위로다’」중에서
창작의 고통은 이처럼 매섭다. 대단한 작품을 짓고 있는 것도 아닌데, 나로서는 꽤나 진지한 고민인 것이다. 무언가 마음속에선 자신을 내보내달라고 쿵쾅대고 있고, 머릿속엔 총체적으로 이런저런 좋은 아이디어가 흩날리는데 아무것도 못하겠는 그 순간. 무기력함이 온몸을 감싸는데 그 느낌은 구체적이다 못해 추상적이고, 추상적이다 못해 구체적이다.
하지만 때론 이런 고통이 즐겁다. 창작의 고통은 능동형이기 때문이다. 외부로부터 오는 고통엔 굴욕감이 들지만, 내가 만들어내는 고통엔 달달한 구석이 있다. 무기력감에 절룩거리긴 하지만, 고통 속에서 때론 진주를 발견하기도 하고 그 뒤에 오는 희열을 맛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고통스러워도, 어쩌면 그 고통을 즐기며 글쓰기를 이어간다.
---「제 3부 ‘글이 써지지 않을 때 글쓰기를 이어가는 법’」중에서
자신의 성공을 위해선 스스로를 잘 대접해야 한다. 브런치에 글을 쓰는 그 시간. 그 순간은 내가 나를 대접하는 기분이 든다. 잘 마련된 인터페이스에, 내 머리와 생각의 부산물들을 요리조리 잘 배치하면 근사한 브런치가 된다. 근사한 브런치 앞에 내 기분은 좋고, 끄집어내어 만든 맛깔난 요리를 보고 나는 자아와 마주한다.
---「제 5부 ‘브런치를 꾸준히 할 수 있는 이유’」중에서
나의 생각과 마음이 담긴 보물단지 같아서다. 이 안에는 지금의 나도 있고, 몇 년 전의 나도 있으며, 이런 생각을 한 내가 있고, 저런 생각을 한 나도 있다. 이러한 무형의 자산을 모아놓은 곳이 바로 브런치다. 나는 더 바빠졌다. 브런치를 하고 난 뒤다. 정확히는 글을 쓰고 난 후다. 브런치는 내가 글을 쓸 수 있는 용기와 동기를 주었다. 나 말고도 브런치를 통해 비상한 사람들이 많다.
---「제 5부 ‘브런치를 열면 지금도 설렌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