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튜어트 밀은 자기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친구들 몇 명과 함께 공리주의자 협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공리주의자라는 말을 세계 최초로 사용했다고 자서전에 씁니다. 하지만 이것은 문제가 있는 서술이에요. 이미 공리주의라는 말은 존 스튜어트 밀이 협회를 만들기 전, 1815년에 이미 제러미 벤담이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면 자랑이 좀 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튼 그는 공리주의자 협회를 만들어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을 이끌면서 이 주일에 한 번씩 모임을 합니다. 이 협회의 특징은 회원들이 모두 납득할 때까지 토론을 계속하는 것이었어요. 어떤 한 주제에 대해 그냥 지나가는 법 없이 논문과 책을 읽고 비판적인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아버지가 쓴 책도 읽고, 제러미 벤담의 책도 읽었습니다. 열여섯 살의 존 스튜어트 밀을 중심으로 마지막에는 열 명까지 회원 수가 늘었습니다. 충분한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회원을 새로 받아들였기에 그 이상으로 늘어나진 않았습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이 모임을 오랫동안 유지합니다. 당면한 사회 문제를 토론하고 중요한 문헌을 함께 읽으면서요. 어떤 문제를 비판할 때엔 옳고 그름을 먼저 판단하기 전에 비판하게 된 이유와 논리를 상대방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 역시 아버지에게 배운 소크라테스의 방법이라고 볼 수 있겠군요.
--- 「공리주의자 협회를 만들다」 중에서
존 스튜어트 밀에게 글쓰기의 영감을 준 사람들은 영국 사상가들이나 작가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프랑스의 사상가들, 특히 계몽주의 시대의 작가들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여러분,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이라는 사람에 대해 들어보셨지요? 대표적인 작품으로 『팡세Penses』(1670)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수상록’이라거나 ‘명상록’이라는 타이틀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존 스튜어트 밀은 파스칼이 쓴 유명한 문장, 즉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와 같이 한눈에 딱 들어오는 그런 글쓰기에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17세기 사람의 문장인데도 현대에 활동하는 카피라이터의 글 같죠? 이미지와 의미를 동시에 갖춘 그런 문장입니다. 존 스튜어트 밀은 파스칼 이후 계몽사상가 중에서는 볼테르(Francois-Marie Arouet, 1694~1778)를 좋아했습니다(볼테르Voltaire는 필명입니다). 존 스튜어트 밀은 볼테르가 쓴 힘 있는 글을 대단히 좋아했고, 그런 식의 글쓰기를 익히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존 스튜어트 밀 자신의 글쓰기는 힘은 있는데 독자들이 읽기에는 쉽지 않습니다. 19세기 후반 영국에서는 존 스튜어트 밀을 ‘영국의 아리스토텔레스’라고 칭송합니다. 명성이 아주 드높아진 거죠. 심지어 영국 고등학교 과정이나 대학 초년생들 사이에서 존 스튜어트 밀의 글을 그대로 베껴 쓰는 필사가 성행했다고 합니다. 존 스튜어트 밀의 글이 영국식 글쓰기 교육에서 모범문장으로 꼽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글은 쉽지 않습니다. 영어로 읽어도 어려워요.
--- 「‘힘 있고 알기 쉽게’, 존 스튜어트 밀의 글쓰기」 중에서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에서 말하는 다양성의 핵심이 되는 자유의 영역은 바로 ‘사상의 자유’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 헌법에는 자유를 규정하고 있는 부분이 있어요. 2장인 〈국민의 기본적 권리와 의무〉에서 그 내용을 규정하고 있는데, 여기에 사상의 자유가 명시되지 않았습니다. 아마 이 세상 민주주의 국가 헌법 중에서 사상의 자유를 명시하지 않은 나라가 또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모든 헌법의 핵심인 기본권, 인권의 핵심은 사상의 자유입니다. 모든 자유는 생각의 자유에서 출발하니까요. 우리나라 제헌 헌법보다 훨씬 전에 만들어진 많은 헌법, 이를테면 18세기에 만들어진 영국 헌법, 프랑스 인권선언, 그리고 수많은 나라의 헌법에 이르기까지 무엇보다 중요한 자유의 핵심과 기본은 사상의 자유입니다. 자유에 ABC가 있다면 사상의 자유는 단연 A입니다.
--- 「인권의 핵심은 사상의 자유」 중에서
그는 “국회의원은, 즉 하원의원은 자기 스스로 의원이 되려고 해선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원칙인데요. 바로 ‘추대를 받아야 한다’는 뜻이지요. 두 번째 원칙은 “의원은 선거운동을 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이 뭐라고 항변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존 스튜어트 밀은 이 책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선거운동을 하지 마라.” 세 번째 원칙은 무엇일까요? “하원의원 입후보자들은 선거에 자신의 돈을 한 푼도 써선 안 된다. 돈을 쓴 만큼 나중에 걷어가려고 할 테니, 이렇게 되면 반드시 부패하기 마련이다.”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네 번째 원칙은 “내가 웨스트민스터 선거구의 하원이 되었다고 해서 내 선거구의 이해관계에 관련된 일을 나 스스로 의회에서 이야기하면 안 된다. 의원은 전 국민을 대표하는 사람이지 특정 선거구민과는 상관이 없다. 따라서 선거구에서 시행하고자 하는 사업이나 어떤 일을 하려고 예산 문제를 주물럭거리고, 선거구민한테 잘 보이려고 선거구에 관련된 국책사업이나 아파트 재건사업 같은 짓을 국회의원이 하면 안 된다.”고 단단히 강조했습니다.
--- 「의회로 간 존 스튜어트 밀」 중에서
존 스튜어트 밀은 적어도 제국주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그다지 지성인다운 면모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도덕심이나 연민을 갖는 정도였어요. 제국주의 자체나 식민지 지배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인 제임스 밀이 주장한 이른바 문명화 과업으로서의 식민지 착취 합법화, 혹은 정당화 과정에 존 스튜어트 밀도 나름대로 충실했습니다. 영국에서 보면 애국자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의 입장이나 식민지를 경험했던 사람들의 처지에서 보면 제국주의자임에 분명합니다. 비판을 피하기 어렵지요. 그런데도 일부 학자들은 영국이나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에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역사 전체를, 즉 세계사 전체의 상황에서 보면 그 역시 문명화 과업을 이룬 것이다, 영국이나 프랑스가 강력한 제국을 형성해서 식민지 제국을 문명화한 것이다, 일종의 시혜를 베푼 것이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학자들이 지금도 있어요. 하버드대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퍼거슨도 여전히 그런 주장을 하고, 일본의 학자들이나 한국의 학자들 중에도 식민지 지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학문적인 차원에서, 지식의 차원에서, 문화예술의 차원에서, 혹은 정신적인 차원에서 여전히 제국주의 침략이 옳았다, 서양이 우월하다, 라고 주장하면서 비서양에 대해서는 조금 멸시하고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 「존 스튜어트 밀의 부정적인 측면」 중에서
사실 공리주의는 반드시 부정해야 한다거나 거부되어야 할 사상이 아닙니다. 현실을 중시하는 공리주의의 첫 출발은 매우 신선했어요. 특히 존 스튜어트 밀이 공리주의자 협회를 만들어서 나름대로 사회개혁의 뜻을 품었을 때의 공리주의는 기존 영국 사회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었습니다. 영국을 지배해온 영국 국교의 종교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권위주의는 물론 국교와 왕족, 귀족이 지배계층을 만들어서 하층 민중을 기만하거나 착취하는 데 대한 모종의 저항이었죠. 존 스튜어트 밀이 주장한 공리주의는 이처럼 긍정적인 측면이 강했습니다. 그런데 벤담을 위시한 초기 공리주의자들은 인간의 실리 추구를 강조했습니다. 가난으로부터의 해방, 즉 굶주림과 기아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기 위한 기본 전제가 바로 공리주의였습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공리주의가 경제적 가치를 존중하고, 실리를 따지는 사상으로 각인된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 권력을 등에 업은 상류층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해도 신의 말씀으로 극복할 수 있다, 라는 식의 종교적인 허위의식을 퍼뜨렸습니다. 존 스튜어트 밀은 바로 여기에 저항하는 의미로서 공리주의를 주장한 것이지요.
--- 「배부른 돼지가 될까,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될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