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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흘은 수천 년이고

한 사흘은 수천 년이고

파란시선-0079이동
최동은 | 파란 | 2021년 05월 2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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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5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130쪽 | 204g | 128*208*9mm
ISBN13 9791187756941
ISBN10 1187756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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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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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애인

한 번도 본 적 없는 애인이 문경에 삽니다 문경은 그런 곳 어둡게 걸어 들어가고 환하게 걸어 나오는 곳 오늘도 나의 애인은 고개를 넘고 때죽나무 꽃 피는 산길을 걸어갑니다 그림자 앞세우고 두고 온 여자의 손을 꼭 잡고 갑니다 산길이 끝나는 곳에 집이 있고 집 너머에 또 산이 있어 몇 번의 생이, 몇 번의 밤이 머물다 갑니다 애인을 만나러 가는 길에 한 줌 햇빛을 손바닥으로 비벼 봅니다 바스스 부서져 내리는 이름 매미 울음 따라 첩첩산중 문을 열고 기다린 애인 만나러 갑니다
깊고 아득한 곳입니다 문경은,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사랑이 흔들리고…… 갈참나무 이파리들은 애인의 푸르고 시원한 이마를 닮았습니다 처음 보는 저녁을 따라 그리운 지병 고치러 문경 갑니다
――――――――――――――――――――――――――

명암

하필 그때 잠이 쏟아졌을까
냇물을 건너야 하는데 물이 불어나고 있는데
들고 있던 조팝꽃이 분홍 신발 한 짝이
물에 떠내려가는데

한 주먹 돌멩이를 던지고
거머리 헤엄을 치고
물에 떠내려가는데

붉은 지붕이 멀어지고 할머니가 손을 흔들고 대문이 닫히고
엄마는 또 동생을 낳았지

몇 번째 동생인가 죽은 오빠는 몇 번째인가
깜깜 하늘에 별자리를 세어 보고 지우는데
쌍둥이자리에서 동생들이 태어났는데
잠깐 나무 계단에 앉아 졸았는데

동생은 떼를 지어 울고
엄마는 멀어지고
꿈속을 빠져나간 새 한 마리
지붕 위에 앉았다 오동나무 위에 앉았다
날개를 두고 날아갔는데

다락에 숨어 어미 거미를 잡아 죽였다
기어가는 새끼도 손톱으로 꾹꾹 눌렀다
넌 무서운 아이구나

종아리를 맞고 찢어진 색종이 이파리를 붙이는데
어지럽고 미슥미슥 잠이 쏟아지는데
엄마는 계속 죽은 동생들을 낳았는데
――――――――――――――――――――――――――

나일강 투어

한 사흘 밤낮을 당신을 따라 흘렀지요 당신 몸 냄새로 머리카락을 적시고 당신 배 위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오줌을 누고 꿈을 꾸었지요 뜨거운 아침 햇살에 손을 적시며 당신 가슴으로 흘렀지요

당신이 둑을 무너뜨리고 범람할 때 나도 굽이치며 범람했지요 시꺼멓게 기름진 땅에 배추를 심고 파도 심고 양들을 기르며 흘렀지요 푸른 풀밭에서 뒹굴고 올리브나무 밑에서 당신 닮은 아이를 낳으며 당신과 흘렀지요

파피루스 우거진 강기슭에서 한 남자가 작은 배를 타고 고기를 잡고 있었지요 곱슬머리 아이가 토속 인형을 팔았지요 태양신 부적을 목에 걸고 주문을 외며 흘렀지요 낯선 남자 팔에 안겨 춤추며 흘렀지요 황금색 태양을 향해 두 팔 벌리고 당신 눈 속으로 흘렀지요

때로 잔잔한 물결 위에서 노래 부를 때 왜 알 수 없는 슬픔이 차올랐을까요 그때 캄캄하게 그믐 달빛이 흘러들고 당신 가슴에 눈물 쏟았을까요 한 사흘은 길고 한 사흘은 짧고 한 사흘은 수천 년이고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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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은의 시를 보면 존재 자체가 백화(白?)라고 한 르 끌레지오의 말이 생각난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존재들은 실재 같으나 사실 부재하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는 실재와 부재를 하나로 보는 것 같다. 그는 실재 같은 그 부재들을 사랑하고 미워하고 툭툭거리며 부재가 어떻게 실재를 끌고 가는지 보여 주고 있다. 그의 시에는 삶과 죽음, 이녁과 저녁이 혼재해 있다. 미셀 푸코가 말한 헤테로피아적 시간이라고나 할까? 이런 그의 시공은 잠 속인가 하면 잠 밖이고 잠 밖인가 하면 잠 속으로 나타난다. 그에게 잠 밖과 잠 속은 사실 같은 곳이다. 예를 들면 자신은 오래전부터 여기 살고 있는데 누군가 당신은 이미 (사흘 전에) 죽은 존재라 하고(?자정?), 또 자신은 다만 나무 계단에 앉아 잠깐 졸았을 뿐인데 어느 틈에 동생들이 생겨나 떼 지어 울고 엄마는 멀어져 간다(?명암?). 그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애인을 문경에 가지고 있다 한다(?문경 애인?). 그 애인이 실재하는지 부재하는지 그는 구태여 알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종의 믿음이다. 그 믿음이 사실 부재인 이 삶 속을 그가 환히 들락거릴 수 있게 하는 힘이라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그리하여 그는 오늘도 없는 애인을 찾아 때죽나무 꽃 피는 산길을 걸어 없는 문경에 간다. 비록 그곳이 깊고 아득하고 비 오고 바람이 부는 곳일지라도 그는 그곳이 틀림없이 처음 보는 저녁같이 아름답고 서늘한 곳이며 그리움이라는 몇 생의 지병을 고칠 수 있는 곳이라 믿기 때문이다. 꿈같기도 현실 같기도 한 그의 말들은 마치 먼 시간의 저편에서 들리는 노래처럼 낯설고도 신비롭다.
- 이경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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