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의 민족수난기와, 6·25 전후의 동족상잔기, 전후의 초보 독재화기, 4·19혁명 직후의 자유 만복기, 이후 군사정권하의 억압기와 유신 치하기, 10·26 이후의 신군부 치하기, 이어 겉만 화려했던 문민정권 치하와, 그 틈틈이 좌편향 포퓰리즘 정권의 발호기와 법치 무력화기…, 민초들의 시각에선 통틀어 ‘국난기(國難期)’라 부를 만했다. 이들 중에 특히 대구의 민초들이 목격하고 마주쳐야 했던 신산고초(辛酸苦楚)와, 가끔은 짧았던 환희의 틈 사이에 일어났던 사건과 인물들의 기록을 더듬어본 것이 바로 이 ‘대구 이야기’이다.
오래 묵혀두었던 신문 연재분 50꼭지에, 새로 쓴 7꼭지(제5부)를 덧붙여, 제1부 일제강점 초기의 대구 풍정과 인물들. 제2부 항일과 굴종의 수난시대. 제3부 해방공간의 혼란과 좌절. 제4부 분단과 전란에 찌든 시대상. 제5부 혼돈 속에 자아 찾기 몸부림으로 나누어 묶어보았다. 못다 다룬 사건과 인물도 없지 않지만, 뒷날을 기대하기는 현재로선 무리이다. (중략)
대구(大丘), 달구(達丘), 달구벌(達句伐)로 불리기도 했던 대구(大邱)의 지명 변천사만큼 대구를 상징해온 별칭도 많았다. 소수나마 일제하에 치열했던 항일도시, 긴 역사의 약령시(藥令市)도시, 미 군정하에 붙여졌던 폭동(항쟁)도시며, 조선의 모스크바란 비아냥부터, 6·25 때의 군사도시, 피란도시, 사수도시, 1950년대 후반의 야당도시, 데모도시, 그 이후의 정치도시, 여당도시, 보수도시가 모두 그것……. 또 교육도시, 문화도시에, 가끔은 인물도시, 미인도시로도 불렸고, 특화산업에 빗대어 능금도시, 섬유도시로 지칭되기도 했다. 『국난기의 사건과 인물로 보는 대구 이야기』를 엮은 뜻 역시 이 모든 ‘별칭 대구’에 대한 탐색 작업의 일환임을 알아줬으면 싶다.
--- 「책머리에」 중에서
일제하 대구의 상권은 몇몇 외형이 영세한 분야를 제외하곤 거의 일인들의 수중에 있었다. 몇몇 분야라면 대구 신정(新町, 대신동)에 위치한 ‘큰 장’(서문시장)의 건어물, 유기, 옹기, 사기 외에 광목, 모시 등 재래직포 따위였다. 또 남성정 약전골목의 한약재 상권과, 전래의 탁주(막걸리) 양조업, 정미업과 중 소규모 양곡 매매업, 걸음마 단계의 소규모 직조업, 그리고 고된 노동력을 원천으로 한 채소 과일의 생산과 판매, 정육업 등에서 일인들과 힘겨운 경쟁을 하거나 겨우 따돌리고 있었을 뿐이다.
신분과 직업 차별의 대표적 사례였던 정육 판매업은 30년대까지만 해도 백정(白丁)들의 전문 업종이었다. 이 무렵 경상도의 푸줏간에선 어른 아이 없이 “고기 주게” 하며 반말로 주문하는 악습이 예사였다. 도서출판 현암사의 고 조상원(趙相元, 1913~2000) 회장은 “사람 차별하면 못쓴다”라고 가르친 부친의 영향으로, 푸줏간 심부름 때면 꼭 “소고기 한 근 주이소” 했더니, 그의 경어에 감격한 백정 주인이 소고기를 덤으로 듬뿍 주더라는 일화를 남긴 바 있다.
--- p.76
쌀값이 무섭게 뛰자 미군정은 새해부터 미곡가의 자유시장제를 없애고 최고가격제를 실시키로 했다. 쌀값을 대두 한 말에 74원(소두는 38원) 이상 못 받게끔 못을 박은 것이었다. 아울러 12월 하순부터 추곡수매제를 시행하여 벼(나락) 한 가마에 175원으로 사들였다. 이러자 생산자인 농민이 수매에 잘 응하지 않아 쌀의 출하량이 줄어들었다. 또 최고(공정)가격제 실시로 유통량마저 줄자, 쌀의 암거래가 기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암거래 쌀은 소두 한 말(닷 되)에 공정 가격의 세 배가 넘는 120원에도 쉽게 구할 수 없었다.
미군정은 한 사람 앞 네 말 닷 되의 농가 보유미 외엔, 전량을 수매에 응하지 않으면 엄벌에 처한다고 얼렀다. 그러나 일제 때의 강제 공출 악몽이 되살아난 농민들은 그런 엄포를 놓는 미군과 친일 관리 및 경찰에 대해 반감만 더했을 뿐 수매를 기피했다. 한 사람 앞 2홉 4작으로 정해진 도시민에 대한 배급제 역시 비축 물량의 부족과, 부패한 일부 관공리의 가로채기로 유명무실해졌다. 이로 인해 1946년 1월 중순, 소두 한 말에 160원을 주어도 암거래 쌀은 아무나 구할 수 없게 되어, 학교 기숙사가 문을 닫았고 하숙생들이 하숙집에서 쫓겨났다. 또 결식 아동이 늘어나, 칠성 국교는 80%, 봉산국교는 70%의 학생이 도시락을 못 싸 왔고, 아침식사도 죽으로 때우는 아동이 20%를 웃돌았다.
--- p.93~94
1946년 10월에 발생한 ‘대구 10·1사건’은 7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몇 가지 해묵은 논점들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첫째, 사건의 성격이 폭동이냐, 항쟁이냐는 문제이다. 우파와 관변(官邊)은 주저 없이 폭동으로 규정지어왔다. 반면에 좌파와 일부 수정주의자들은 항쟁(인민항쟁)이란 변함없는 주장이었다. 이런 대척점을 피하기 위해 일부에선 ‘폭동’ 대신 ‘소요(騷擾)’로, ‘항쟁’ 대신 ‘봉기(烽起)’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여기에도 논란의 요소는 많다. 그 결과, 폭동의 요소와 항쟁의 요소가 때와 곳에 따라 혼재되어 있어, 한마디로 단정 짓기는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따라서 대구 10·1사건이란 가치중립적인 표현도 쓰곤 하지만 이 역시 좌우의 불만 섞인 시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 p.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