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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4월 29일
쪽수, 무게, 크기 272쪽 | 324g | 135*200*18mm
ISBN13 9788966551347
ISBN10 896655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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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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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타인의 불행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내 몸으로 체화되지 않은 슬픔은 단지 구경거리일 뿐이거나 가십거리처럼 사람들의 입으로 옮겨 다녔다.
문경이 할 수 있는 건 침묵의 자세를 유지하는 거였다.
앞으로 나서지 말 것. 자기 존재를 드러내지 말 것.
청소년기의 학창 시절, 문경에겐 오래간 친구가 거의 없었다. 혹시라도 문경의 가족사를 아는 친구와 엮이게 될까 봐 같은 초등학교 출신의 동창들과는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는 중학교 동창들과 그랬다. 새로 사귄 친구들과는 가족 얘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 p.34

한영통상에서 파는 족보를 사는 ‘아버지’들 중엔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치장할 허세와 권위를 돈으로라도 메우려는 욕망으로 가득 찬 인간들도 있었다. 어쩌면 족보를 파는 인간이나 사는 인간이나 그 하수인 노릇을 하는 미스 백이나 문경과 같은 풋내기 초짜도 아는 인생을 그들이 모를 리는 없었다. 무엇으로든 허겁지겁 채워야 할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계 족보와는 달리 한영통상에서 취급하는 족보는 일종의 백과사전 같은 것으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게 딱 맞는 말이었다. 자고로 뼈대 있는 집안은 항렬자를 따라 이름을 올리는데 그 가지를 타고 가다 보면 위로 뻗으나 아래로 뻗으나 백발백중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는 지점이 나온다고 최는 말했다.
--- p.106

“나는 늘 어딘가로 가고 싶은데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어. 네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뭘 원하는지 물어보고 싶은데 내가 짐이 될 것 같아 그랬어.”
오 군이 문경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문경은 그의 손을 뿌리쳤다.
“집에 가자.”
그가 일어서서 문경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들은 다시 묵묵히 어두운 새벽길을 걷기 시작했다. 택시 한 대가 멈춰 설 듯하더니 그냥 지나갔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요?
--- pp.140~141

“여보세요. 여보세요.”
최는 송수화기를 다른 손으로 바꿔 쥐며 소리를 질렀다.
최가 뭐라고 묻기도 전에 상대방은 전화를 끊어버린 듯했다. 최는 송수화기를 내동댕이치듯 내려놓으며 내뱉었다.
“씨발, 그런 사람 없대. 튀었어!”
미스 백이 제출한 이력서에 적힌 전화번호는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미스 백이 의도적으로 전화번호를 틀리게 적었거나 전화번호가 바뀌었거나.
--- p.204

문경은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리고 있던 한영통상 열쇠를 꽉 쥐었다. 지하상가를 빠져나와 전철역으로 가는 통로의 하수구 덮개 구멍 사이로 열쇠를 흘려 넣었다.
이젠 안녕이다, 영원히.
쇠붙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열쇠는 수챗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았다. 안녕이라는 말조차 사치스러웠다. 말 그대로 영원히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문경의 행동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었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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