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사위를 산더미처럼 사서, 어떻게 하면 예상한 숫자가 나올지 머리에 쥐가 날 만큼 필사적으로 훈련했다. 어느 정도 지나자 흐름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떻게 하면 지는지도 알게 되었다. 와다 부장과 밤 10시부터 아침 6시까지 친치로린을 하면서 나와 가메야마는 정확히 5만 엔씩을 잃어주었다. 그러면서 넌지시 말을 꺼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영화로 만들고 싶은데, 밀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날 아침 출근했더니, 와다 부장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도시오 씨, 영화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그동안 말하지 못했지만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탄생한 계기는 도박이었던 것이다.
--- p.28
「미래소년 코난」을 마무리했을 때, 사람들은 모두 미야가 앞으로 감독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카하타가 ‘세계명작극장’2의 제3탄으로 「빨강머리 앤」을 만든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자신이 도와주겠다고 나서서 그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26화 시리즈를 만든 감독이 다시 스태프로 돌아오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미야다운 모습이다. 자기 과시욕도 있지만, 자기 소멸욕도 있다. 모두를 이끌고 일할 때는 즐겁지만 일이 끝나면 싸움도 끝나고 해도 저문다. 그러면 쓸쓸함과 허망함을 느끼고 다시 사람들과 같이 작품을 만드는 즐거움을 찾아가는 것이다.
--- p.39
스튜디오의 이름을 둘러싸고 많은 아이디어가 나왔는데, 최종적으론 미야가 정했다.
“이탈리아의 군용정찰기 중에 지브리라는 게 있거든. 스튜디오 지브리로 하고 싶어.”
그는 그렇게 말하며 ‘gibli’라고 알파벳으로 써서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외국어를 잘하는 다카하타가 이의를 제기했다.
“이봐, 정확한 발음은 기블리 아닌가?”
“아닙니다. 이탈리아 친구가 지브리라고 했어요.”
그리하여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이름의 스튜디오가 탄생했다. 나중에 기블리가 맞다는 게 밝혀져서 전 세계 사람들은 모두 ‘스튜디오 기블리’라고 부르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 p.47
「이웃집 토토로」에서 여자아이는 원래 한 명이었다. 그런데 다카하타에 대한 대항심에 불탄 미야가 “영화를 길게 만들 좋은 방법이 없을까?”라고 머리를 짜낸 결과, 여자아이를 두 명으로 늘렸다. 지기 싫어하는 미야의 성격이 사츠키와 메이를 탄생시킨 것이다. 포스터에도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원래 버스 정류장에서 토토로와 여자아이가 서 있는 그림이 있었는데, 그때는 자매가 아니라 혼자였다. 미야는 토토로 옆에 사츠키와 메이를 모두 세우려고 했지만, 막상 그려보니 어딘가 어색했다. 그래서 사츠키와 메이의 합친 한 명의 여자아이를 그렸다. 포스터를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키와 헤어스타일, 입고 있는 옷까지 사츠키와 메이를 합친 모습이다. 미야의 그런 센스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 p.62~63
새 스튜디오가 완성되자 세무서 직원이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찾아왔다. 고정자산세를 책정하기 위해 건축 도중에 찍은 사진까지 가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밖에서만 봤는데, 오늘은 내부도 보여주십시오.” 그의 얼굴에서는 연신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자산세를 많이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내부를 보여주는 사이에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리고 모든 층을 둘러보고 1층으로 내려왔을 때는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잠시 지나서 그는 겨우 무거운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런 건물을 보고 자산 가치를 매기는 데 전문가입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창조적으로 연구해서 싸게 지은 건물은 본 적이 없습니다……. 도대체 누가 설계했습니까?”
“미야자키 하야오 씨가 직접 설계했습니다.”
그 사람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 p.118~119
다카하타는 단순히 CG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CG가 아니면 할 수 없는 표현을 추구했다. 그가 예로 든 것이 디즈니의 「미녀와 야수」 CG였다. 1992년 개봉 당시에 춤추는 장면의 CG가 화제를 불러일으켰는데, 전문가적 입장에서 그것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정작 멋진 것은 영화의 앞부분, 주인공이 노래를 부르며 집을 나와 앞쪽으로 걸어나온 뒤, 다리를 건너 마을로 들어가는 장면이다. 컴퓨터를 이용해 상당히 긴 움직임을 카메라 한 대로 따라가듯 찍었는데, 만약 옛날처럼 멀티플레인 카메라로 찍었다면 조금 과장해서 수십 미터의 촬영대를 만들어야 한다. 즉, CG를 사용함으로써 옛날에는 불가능했던 촬영이 가능해졌고. 디즈니에는 이미 그런 기술을 활용할 줄 아는 우수한 스태프가 있었던 것이다. 완성된 영상만 보고 그런 촬영기법과 의의를 완벽하게 이해한 다카하타도 대단하다. 실제로 「이웃집 야마다군」을 제작하는 도중에 디즈니의 책임자가 견학하러 왔는데, 다카하타가 작업하는 모습을 보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다카하타는 옛날부터 새로운 기술에 대해 굉장히 탐욕스럽게 매달리는 면이 있었다. 미야가 그런 그를 보면서 “일본의 셀 애니메이션 기술은 대부분 다카하타 씨가 발명했지”라고 말할 정도였다.
--- p.186~187
안도라는 애니메이터는 ‘재미’보다 ‘정확도’를 우선하는 타입이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는 임팩트를 주기 위해 정확한 데생을 희생하는 일이 종종 있다. 미야 감독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키를 바꾸기도 하고 원근법을 무시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이 미야 그림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안도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떻게든 정확하게 그리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미야의 지시를 받아들이면서도 자기 방식대로 ‘정확한’ 애니메이션을 적용해나갔다. 완성된 러시 프린트를 보면 미야도 안도가 어떻게 작업하고 있는지 알아차린다. 그래도 처음에는 마음속의 분노를 참았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점차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노년에 접어든 베테랑 감독과 젊은 애니메이터의 치열한 싸움이다. 프로듀서로서는 마음이 조마조마하면서도 검호의 명승부를 보는 듯한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치열하게 싸운 결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속 매 장면은 손에 땀을 쥘 만큼 박력이 넘치게 되었다.
--- p.203~204
지금 다시 보아도 「벼랑 위의 포뇨」의 첫 부분은 굉장하다. 그것을 전부 손으로 그렸다고 생각하면 눈앞이 아득해질 정도다. 영화감독에게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나이에 맞게 잘 시드는 사람과 시들지 않고 그대로 돌진하는 사람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시들고 싶어 하는 타입이다. 그런데 시드는 재능이 없다고 할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결국 힘이 넘치는 작품을 만든다. 「벼랑 위의 포뇨」에서도 미야는 파도를 거의 혼자 그렸다. 파도의 새로운 표현에 집착한 것이다. 애초에 지금 일본 애니메이터의 파도 그리는 방법은 「미래소년 코난」에서 그가 개발한 것이다. 그것이 널리 퍼져나간 지 수십 년이 지나 새로운 파도를 만들기로 결심하다니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 p.263~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