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심리학을 창시한 C. G. 융은 이 세상에 융 학파는 엄밀하게 말하면 자기 한 사람밖에 없고, 모든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그 자신의 생각을 확립해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인간 정신의 목적, 즉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사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들이 그들 자신으로 되는 것인 “자기”(self)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사람다운 말이다. 사실 융은 모든 사람들에게 “무의식”(un-conscious) 현상에 대한 체험은 있지만, 그것이 아직 개념으로 확립되지 않아서 사람들의 무의식의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을 때 “단어 연상검사”(word association test)를 고안하여, S. 프로이드가 이론적으로만 주장했던 “무의식”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증명하였다. 현대 정신의학에서 말하던 무의식 또는 잠재의식(subconscious)이 가설로만 존재하던 것에서 벗어나 하나의 현실태로 존재하게 하는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프로이드는 융의 공헌을 높이 평가하였고, 융을 초대 국제정신분석학회장으로 추대하면서 융과 같이 초기 정신분석 운동의 기초를 닦아나갔다. 그러나 융이 프로이드의 관심사와 성향이 너무 달랐고, 프로이드가 융의 창조적인 특성을 담기에는 한계가 있어서 융이 프로이드를 떠나 그의 독자적인 사상 체계를 확립한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렇게 하면서 융은 “그 자신의 생각을 확립해서” 융 학파가 되었다.
이 책의 저자인 엘리 윔베르(E. Humbert)도 어떤 의미에서는 융만큼 독자적인 사상가이고, 융이 말했던 “그 자신의 생각을 확립해나갔던” 사람이다. 그는 융의 사상에 기반을 두고 융의 사상을 설명하지만, 융이 미처 다 말하지 못한 것, 어쩌면 융의 무의식에서 아직 다 발화(發話)되지 못한 것을 설명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융이 설명한 인간의 정신 현상을 융과 같은 토대에서 보면서 융이 아직 다 설명하지 못한 것들까지 보았고, 그것들까지 말했던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융의 사상은 또 다른 각도에서 관찰할 수 있게 되고, 훨씬 더 입체적으로 보이며, 훨씬 더 깊은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윔베르는 진정한 융 학파라고 할 수 있다. 그 자신의 생각을 확립하였고, 우리들에게도 우리 자신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예로 윔베르는 융의 심리학은 무의식이 “그대로 일어나게 하라”(laisser advenir, to allow to happen), “깊이 생각하라(또는 품으라”(considerer, to consider), “직면하게 하라”(se confronter avec, to be confronted with)라는 세 개의 동사로 설명할 수 있다고 했는데, 윔베르의 이런 설명은 분석심리학의 핵심을 찌르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융은 먼저 그가 프로이드와 헤어진 다음 그에게 찾아왔던 정신적 혼란 가운데서 누멘적인 꿈들을 꾸고, 이상한 환상들이 떠올랐을 때, 그것들을 억누르지 않고, “그대로 일어나게 하였고”, 그것들을 “마음에 품고, 깊이 생각하였으며”, 그것들과 “직면하면서” 그림으로 그리거나 글로 쓰면서 그 의미를 탐구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에게 찾아온 분석자(analysant)들도 그와 똑같이 하게 하면서 치료하였다. 그것이 분석심리학의 치료 방법인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self)에 대한 융의 주장은 인류의 정신사(精神史)에서 어느 심리학자보다 탁월한 공헌이라고 하면서 융의 “자기” 개념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설명하였고, 현대 정신의학의 중요한 토픽 가운데 하나인 “자기애”(narcissism)를 설명하면서 융은 “자기애”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자기애 현상을 분석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정신에너지가 자아(ego)에 집중되는 “자아-점유”(Ichhaftigkeit)라고 설명했다고 하였다. 모든 증상을 무의식의 작용 아래서 파악하는 정신분석학과 달리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 아래서 파악하는 분석심리학에서는 자기애 현상을 “자기-점유”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자기애”는 자기애성 성격장애자들에게만 있는 현상이 아니라 모든 정신질환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이고, 일반 사람들에게서도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이지만, “자기애”라는 단어는 그 증상을 외부에서 제3자의 입장에서 관찰할 때는 그렇게 표현할 수 있지만, 그것을 그 사람의 내면에서 관찰하면 정신에너지의 “자아-점유”로 설명되고, 그렇게 될 때, 치료에 더 도움이 돼서 융은 그렇게 설명하였다는 것이다(여기에서 융은 겉으로 보기에 “자기애”로 보이는 정신 현상을 자아에 에너지가 몰리는 현상이라고 정신-내적으로 살펴본다). 융의 사상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정신 현상을 핵심에서 파악하여, 융과 후대의 융 학파 심리학자들 사이에서 융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으로 도움을 주는 설명이다.
한 가지 더 윔베르가 융의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한 것은 융이 무의식은 하나의 가설이 아니라 확실히 존재한다고 주장했다고 강조한 것이다. 정말 융은 무의식은 의식 못지않게 하나의 주체(sujet)로서 그 나름대로의 사고와 느낌과 의지를 가지고 작용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융은 무의식의 자율성(autonomy)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면서 무의식과 의식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 무의식의 자율성은 개인무의식뿐만 아니라 집단적 무의식의 작용을 살펴볼 때 더 분명하게 느껴진다.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면서 자아-의식이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은 확실하게 지각할 수 있어서 그 존재를 의심하지 않지만, 무의식 특히 집단적 무의식은 눈에 보이지 않고, 듣거나, 만질 수도 없어서 없는 듯이 사는 경우가 많은데, 집단적 무의식도 그 나름대로 사고와 감정과 의지를 가지고 작용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융은 언제나 의식과 무의식의 대화를 강조하였고, 특히 자아-의식과 무관하게 작용하는 원형들의 작용에 자아는 언제나 “종교적인 태도”(religere)를 가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융 사상의 핵심을 꿰뚫는 생각이 아닐 수 없다. 무의식은 프로이드가 주장하는 것처럼 억압만이 아니라 자아-의식의 일방성을 보상하려고 언제나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윔베르의 이런 설명은 그가 융과 똑같이 그 나름대로 무의식의 자율성을 깊이 체험하지 않았으면 나올 수 없는 말이다.
이런 윔베르의 관찰이 가능한 것은 그가 융의 사상에 정통해 있을 뿐만 아니라 종교학, 철학은 물론 프로이드, 라캉, 클라인 등 정신분석가의 사상들도 깊이 연구하였고, 무엇보다도 그의 환자들에 대한 임상 경험이 풍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인간의 정신 현상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살펴보면서, 진지한 태도로 융의 생각을 가지고 관찰하였던 것이다. 그에 따라서 그의 설명은 정곡을 찌르며, 설득력이 있고, 독자들로 하여금 그 자신의 무의식을 들여다보면서 관찰하게 해주는 듯하다. 이 책의 서언에서 프랑스의 융 학파 분석가 비비안 티보디에가 “그는 매우 훌륭한 교양인이었고, 많은 이들은 그의 개방적이고, 심오한 정신을 기억하고 있다”고 한 것은 아마 그의 이런 태도를 지적하는 말일 것이다. 윔베르는 융의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융에게 완전히 경도(傾倒)되어 현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도 융의 사상을 더 발전시킬 수 있도록 스스로의 안목을 길러주는 듯한 것이다.
이 책에서도 그런 윔베르의 특색은 잘 드러나 있다. 이 책은 윔베르가 원형, 집단적 무의식, 그림자, 아니마/아니무스, 자기, 동시성 이론, 상징 등 분석심리학의 주제들에 대해서 강연한 열한 편의 논문을 모아서 편집한 것인데, 그 논문들에서 윔베르는 융의 분석심리학 개념들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융이 그림자나 아니마/아니무스의 특성을 그렇게 말한 것은 인간의 삶에서 발견되는 어떤 부분이 어떻게 전개되는 것을 융이 왜 그렇게 설명했는지 하는 점까지 그 자신의 견해도 덧붙여 설명해서 독자들이 인간의 정신 현상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그는 융의 사상을 명확하게 파악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 현상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돕는 것이다.
이 책에서 흥미 있는 것은 후반부인 제7장 이하인 듯하다. 그는 제7장과 제8장에서 “카이로스”에 대한 융의 생각을 설명하면서, 시간(時間)에 대한 그의 철학을 개진할 뿐만 아니라 중국의『주역』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을 펼쳐나가서 독자들을 또 다른 생각들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제9장 “융과 종교적인 문제”에서 현대 사회의 일상적 현상이 된 “신의 죽음”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다루면서, 그것은 현대인들에게 상징적 차원이 소멸되었고, 프랑스의 종교철학자 앙리 코르뱅(H. Corbin)이 말한 “상상의 세계”(mundus imaginalis), 즉 융이 말한 원형의 세계가 현대인들의 정신에서 희미해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데, 그 논문은 심리학 논문이라기보다는 철학 논문이나 종교학 논문 같은 느낌을 주면서 윔베르의 글들이 가진 묘한 매력을 접하게 한다.
이 책은 본 출판사에서 나온『C. G. 융과 정신치료』(2018)보다 먼저 출판된 책이다. 『C. G. 융과 정신치료』가 윔베르의 생각들 가운데서 정신치료에 초점을 맞추었던데 반해서, 이 책은 분석심리학 이론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므로 독자들이 이 두 책을 같이 보면 분석심리학의 이론과 실제를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 역시 엘리 윔베르 박사의 부인인 Madame Myrtha Gruber-Humbert 박사가 한국어 출판을 흔쾌히 허락해 주어서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그리고 중간에서 수고를 아끼지 않아 준 전 프랑스 분석심리학회장 비비안 티보디에(Viviane Thibaudier)에게도 감사드린다.
2021. 5. 3.
月汀
---「역자 서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