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아버지의 목을 껴안는다) 형님이 수치스럽습니다! 정말 수치스럽습니다. 형님은 어릴 때부터 계집애들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고, 불량배들이나 비렁뱅이들과 어울려 산과 들을 쏘다니고, 악인이 감옥을 피하듯 교회만 보면 도망쳤지요. 그리고 우리들이 집에서 경건하게 기도를 하고 성스러운 설교 집을 읽으며 신앙심을 돈독히 하는 동안, 형님은 아버지를 졸라 얻은 돈을 아무 거지에게나 던져 주었습니다. 그때 이미 제가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오리라고 예감하지 않았습니까? 또 형님이 잘못을 회개하는 토비아1의 이야기보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알렉산더 마그누스2 같은 무지몽매한 이교도들의 모험담을 즐겨 읽을 때도, 저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고 예감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는 형님이 우리 모두를 불행과 치욕 속으로 몰아넣을 것이라고 아버님께 수없이 예언하였습니다! 제가 형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항상 자식으로서의 제 도리를 가로막았기 때문이었지요. 아, 차라리 형님이 모어라는 이름을 갖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제 마음이 형님을 위해서 이렇듯 따뜻하게 고동치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형님을 향한 이 불경스러운 사랑을 떨쳐 버릴 수 없는 탓에, 저는 하느님의 심판을 한 번 더 받게 될 것입니다.
--- p.17
카를 (격렬한 몸짓으로 등장하여, 혼자 중얼거리며 방 안을 이리저리 오간다) 인간, 인간들! 교활하고 위선적인 악어 같은 종자들! 너희들의 눈은 물이고, 너희들의 심장은 쇳덩어리다! 입을 맞추면서도 가슴속에는 비수를 품고 있는 것들! 사자와 표범도 새끼를 먹여 기르고, 까마귀도 새끼들에게 썩은 고깃덩이를 날라다 주는데, 이럴 수가, 이럴 수가! 나는 철천지원수가 내 심장의 피로 건배를 해도 미소 지을 수 있을 정도로 악의를 참는 데는 이골이 났다. 하지만 핏줄의 사랑이 배신자가 되고, 어버이의 사랑이 복수의 여신으로 화한다면, 사나이 대장부의 침착한 마음에 불이 붙고, 유순한 양이 사나운 호랑이로 변하고, 온 몸의 힘줄이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서 터질 듯 부풀지 않겠는가.
--- p. 49
프란츠 형님이 라이프치히로 떠나기 전날 밤, 아주 조용하고 달 밝은 밤이었지요. 형님은 당신과 함께 앉아 그토록 자주 사랑의 꿈을 꾸었던 정자로 나를 데려갔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는데, 이윽고 형님이 내 손을 잡고서 눈물을 흘리며 나지막이 말했지요. 나는 아말리아를 두고 간다. 잘은 모르겠지만, 어쩐지 영원히 아말리아 곁을 떠날 것만 같은 예감이 드는구나. 그러니 동생아, 아말리아를 버리지 말아라. 아말리아의 카를, 카를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에는 아말리아의 친구가 되어 주어라! (프란츠, 아말리아 앞에 무릎을 꿇고 아말리아의 손에 격렬하게 입 맞춘다) 형님은 다시는, 다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나는 형님의 말을 따르겠다고 굳게 약속했지요!
아말리아 (펄쩍 뛰어 뒤로 물러난다) 이 배신자!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겠어요! 바로 그 정자에서 카를은 만약 자신이 죽는다면 절대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말라고 나한테 간청했어요. 당신은 정말로 추악하고 혐오스러운 사람이에요.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요!
--- pp.60~61
도적 카를 (고개를 외면한 채 노인에게 손을 내민다)
모어 백작 이것이 내 아들 카를의 손이라면! …… 하지만 그 아이는 지금 어딘가 멀리 누추한 집에서 고단한 잠을 자고 있겠지. 이 아비의 비탄하는 소리를 두 번 다시 듣지 못하겠지. 아, 애통하구나! 낯선 이의 팔에 안겨 세상을 떠나야 하다니…… 내 눈을 감겨 줄 아들이, 아들이 이제는 아무도 없다니…….
도적 카를 (마음의 동요를 이기지 못한다) 이제는, 이제는 다른 수가 없어. (도적들을 향해) 너희들이 내 곁을 떠나다오! 이제라도 아버님에게 아들을 돌려 드릴 수 있지 않을까? …… 아니 이제는 돌려 드릴 수 없어. 아니! 그렇게 할 수 없어…….
(중략)
모어 백작 이보시오, 낯선 양반! 왜 나를 탑에서 꺼내 주셨소?
도적 카를 이제 어찌 한단 말인가? 아버님의 축복을 도둑처럼 낚아채어서, 그 거룩한 노획물을 가지고 슬쩍 도망을 칠 것인가…… 아버지의 축복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던가…….
모어 백작 내 아들 프란츠도 파멸하였소.
도적 카를 (노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 제가 탑의 빗장을 부수었습니다. 그러니 제게 축복을 내려 주십시오!
모어 백작 (괴로운 표정으로) 그대는 아비를 구하기 위해서 아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소! 보시오, 하느님은 지칠 줄 모르고 자비를 베푸시는데, 우리 하찮은 미물들은 앙심을 품고서 잠자리에 든다오. (도적 카를의 머리 위에 한 손을 얹는다) 그대가 다른 이들을 측은히 여기는 만큼 행복하시오!
--- pp.229~230
도적 카를 이제 모든 것이 끝장이다! 나는 마음을 고쳐먹고 아버지에게 돌아가려 했지만, 하늘에 계신 분이 그러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냉정하게) 마음을 돌려먹으려고 하다니, 이런 어리석은 바보가 있단 말인가? 중죄인이 어떻게 돌아설 수 있겠는가. 중죄인은 결코 돌아설 수 없다는 사실을 벌써 오래 전에 알았어야 했다……. 조용히 하시오, 제발 조용하시오! 이래야 마땅하오. 하느님이 나를 찾으셨을 때는 내가 원하지 않았고, 내가 하느님을 찾을 때는 하느님이 원하시지 않는구려. 이보다 더 당연한 일이 어디 있겠소? 그렇게 눈을 굴리지 마오. 하느님한테는 내가 필요 없는 존재요. 하느님에게는 피조물이 넘치게 많지 않소? 하나 정도 없어도 아무렇지 않을 것인데, 그 하나가 바로 나요. 이보게들, 가세!
--- p.235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