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근대시에서 여행의 시적 수용
1. 지용과 백석의 기행시
1930년대는 여행의 시대라고 지칭된다. 이 글의 목적은 여행으로 근대를 경험했던 시인 정지용(鄭芝溶 1902~1950)과 백석(白石 1912~1996)의 기행시편 및 기행산문을 중심으로 여행 체험과 감각이 어떻게 시적으로 수용되고 표현되었는지 고찰하고 그 의미를 규명하는 것이다. 아울러 근대시의 형성 과정에서 여행 체험과 기행시편은 정지용과 백석의 시에 어떤 시적 개성을 부여하였으며, 근대시의 지형도를 풍부하게 하는 데 어떻게 기여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동안 정지용과 백석 시에 대한 개별적 연구는 여러 학자에 의해 방면으로 심도 있게 논의되었고 수준 높은 연구 성과가 축적되었다. 최근 들어 근대적 공간에 관한 탐구로서 ‘여행 체험’에 집중된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정지용은 일본 교토의 도시샤 대학 영문과에서 유학 시절(1923~1929)에 쓴 「파충류동물」, 「갑판우」와 금강산, 장수산, 한라산을 등반한 산행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장수산1·2」, 「백록담」을 비롯한 다수의 기행시편과 기행산문을 발표했다. 백석은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 학원 영어사범과 유학 시절(1930~ 1934)에 쓴 이즈반도 기행시편 「_崎의 바다」, 「伊豆國湊街道」을 비롯하여, 국내 여행 후에 쓴 「남행시초」, 「함주시초」 등의 연작 기행시편과 만주 체류 시편 「杜甫나李白같이」, 「北方에서」를 남겼다.
이 논문에서는 정지용과 백석이 일본 유학이라는 공통점을 시작으로 국내외의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다수의 기행시편과 기행산문을 남겼다는 점에 주목하여, 근대에 관련된 기존의 다양한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근대를 체험하는 양식의 하나인 ‘여행’을 주제로 이들의 시를 본격적인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특히 백석은 해방 이후 북한에서 쓴 동화시집과 몇 편의 시를 제외한 97편 중 여행 체험과 관련해서 읽을 수 있는 시가 48편으로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이는 새롭고 낯선 세계를 체험한 것이 백석의 시세계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백석의 시에서 유년기의 기억을 시화한 작품을 제외하면 그의 시의 대부분은 기행시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지용이 1941년 문장사에서 간행한 두 번째 시집 [백록담]에 수록된 시 25편 중 ‘산’을 소재로 하거나 배경으로 한 시가 20편이다. 넓게 본다면 이 시집 전체가 산행 체험을 바탕으로 한 기행시편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정지용이 쓴 산문 중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기행산문이다. 시집 [백록담]에 수록된 정지용의 기행시편을 세밀하게 읽기 위해서는 기행산문을 함께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전남 강진을 거쳐 목포에서 밤 배를 타고 제주도에 가는 여정이 담긴 그의 기행산문을 함께 보아야 시 「백록담」에 면밀하게 접근할 수 있다. 정지용이 시인 김영랑, 시인 김현구와 함께 셋이서 김영랑의 고향 강진에 머물면서 쓴 「남유(南遊)」가 있다. 소제목으로 꾀꼬리, 동백나무, 체화, 오죽·맹종죽, 석류·감시·유자를 선정하여 남도의 자연이 가진 아름다움을 서간문 형식으로 쓴 6편의 기행산문이며 1938년 8월 6일부터 23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 「다도해기」는 [조선일보]에 1938년 8월 23일부터 30일까지 실린 총 6편의 기행산문으로 이가락(離家樂), 해협병(海峽病)(1·2), 실적도(失籍島), 일편낙토(一片樂土), 귀거래(歸去來)를 소제목으로 하여 여행의 시작과 끝을 시간 순서대로 썼다. 특히 「다도해기」에서는 동양 고전에서 사용하는 한자어로 소제목을 붙여서 여행의 동기가 옛 선비의 풍류와 정취를 쫓는 것처럼 의도하였다. 그러나 산문의 내용은 실제로 그렇지 않다.
근대적인 여행을 하면서도 간혹 기행시편이나 기행산문의 제목 또는 소제목을 한자어를 사용하여 고풍스럽게 짓는 것은, 정지용이나 백석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이다. 그들은 유학 시절 영미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았지만, 이전에 한시의 전통과 한문학의 영향이 그 기저에 깔려있었다. 1930년대에 이르러 여행이 점차 대중화되고 기차와 호텔을 이용하여 편안한 방식으로 여행을 향유하면서도 경성을 비롯한 대도시가 아닌 이상에는 기차역 인근 지역이나 산이 근대적인 공간으로 인식되지는 않았을 것이며 여전히 전통적인 삶의 방식이 영위되는 장소였다. 그러므로 1930년대의 여행에는 근대적인 것과 전통적인 것이 공존할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시선은 기행산문과 기행시편에도 자연스럽게 반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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