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건봉사를 처음 찾은 건 이태 전이었다. 얽히고설켜 세상의 굴레와 번잡함이 싫어졌다. 가장 절실했던 건 세상 밖으로의 도피였다. 마음의 안식처가 필요했다. 만상이 깃든 세상에서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 틈만 나면 인적 드문 곳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우연히 발길 닿은 곳이 황량한 공터였고, 종일 머물다 그곳이 옛 절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망한 절터를 찾아 떠돌다 건봉사에 발길이 닿은 건 우연이었다. 찾고자 했던 ‘절터’였다기보다 복원이 이미 진행된 사찰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냥저냥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선잠에서 떠돌다 보면 어느새 건봉사였다. 혹독한 겨울이면 더욱 그랬다. 웅웅거리며 창을 흔들어대던 바람 소리 끝에 건봉사가 어른거렸다. 그리하여 인연도 없는 사찰을, 잊을만하면 문득 찾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흰둥이와 함께 능파교를 건너며 내게 미소로 말 걸어 주던 앳된 스님은 잘 계시는지, 흰둥이는 또 얼마나 많이 컸는지…. 지척인 듯 선한 풍경이 나를 흔들었다.
그리하여 실로 건봉사만 들르기 위해 다시 고성에 온 것이다. 건봉사는 군사보호 구역에 포함돼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었던 곳이었지만, 근래 건봉사를 출입하는 길만 해제됐다. 거대한 산이 남쪽과 북쪽으로 끝없이 누웠고, 그 산등선 어딘가에 휴전선이 놓였다. 금강산은 휴전선 어디쯤에서 시작하는데, 건봉사는 영산으로 손꼽히는 금강산의 초입에 있어 ‘금강산 건봉사’로 불린다. 백두대간 산세가 지극히 아름답다. 신神은 필시, 금강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자리를 비워 건봉사를 세웠을 것이다.
--- p.29, 「고성 건봉사 터」 중에서
“휴전선 이남, 고성 땅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탑이라우. 6·25 때, 내가 피난 갔다 와도 거뜬히 남아 있었으니…. 어찌나 반가웠던지 몰라. 근데 난리 통에 많이 상했다우. 총 맞은 자국이 아직도 선명해. 6·25를 겪느라 좀 깨져서 그렇지, 내 보기엔 우리 탑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해. 가장 잘생긴 탑이라우. 잊을 만하면 이 골짜기까지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고, 반갑고 말고지요.”
평생 탑을 보며 살아왔다는 영감님의 모습이 무명의 절터에 서 있는 고졸한 모습의 탑과 닮았다. 묻고 물어 어렵게 찾아온 탑은, 고성산 북동쪽 무명의 계곡 인근에 비록 돌덩이 몇 개로 겨우 쌓아 올린 듯 허술했으나, 그간 만났던 어떤 탑보다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더 마음이 간다. 금수리 석탑을 만난 후 무엇을 대할 때면 잘나고 못난 것에, 번성과 쇠락에 차이를 두지 않기로 했다.
--- p.60~61, 「고성 건봉사 터」 중에서
오래전 누군가 한계령 그 어디 즈음에 오랫동안 잊힌 절터가 있다고 했다. 무심히 흘려들었던 이야기가 근래 불쑥 떠오른 것은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골 깊은 산을 배경으로 흰 눈을 흠뻑 덮어쓴 석탑 하나가 전부인 사진이었다. 볼 것도 없는 사진에서, 눈발 날리는 한겨울임에도 고즈넉한 적요가 풍겼다. 탑과 적요는 오랫동안 마음 한구석에 떠돌았다. 꼭 만나야 할 인연처럼 매일 잠자리에서 한계령을 넘고 넘었다.
절터로 오르는 길은 아늑했다. 발에 감기는 촉감이 신선했다. 적당히 자란 나무 그늘에 그만그만한 풀들이 조붓했다. 폐가 한 채를 끼고 도니 우거진 나무 아래 돌계단이 나타났다. 그늘진 곳에 이끼가 잔뜩 끼어 오래 묵은 티가 났다. 과거로 향하는 통로인 듯 신비스러움마저 감돌았다.
옛날 사람들이 수없이 밟았을 돌계단을 오르니 ‘한계사지寒溪寺址’라는 안내판과 함께 너른 풀밭이 나타났다. 풀밭은 햇살을 받아 눈부셨다. ‘이 험한 골짜기에 양지바른 평지라니….’
절터는 한계령 서쪽, 설악산 서북릉과 내설악 가리봉 능선의 골짜기에 깊게 은둔하고 있었다. 거대하고 웅혼한 산줄기가 병풍처럼 펼쳐진 숲속에 숨어, 마치 깊은 산중에서 우연히 마주하게 되는 한 채의 대궐처럼 묘했다.
시공을 초월하는 통로를 건너온 듯, 북적이던 인적은 저 건너의 세상으로 밀려났다. 절터는 폐허의 시간을 넘어 원초의 것으로 돌아가기 위해 숨을 고르고 있었다. 풀과 나무는 적당한 간격으로 섰고 바람의 흐름도 달랐다. 눈앞에 존재하는 신선의 땅이었다. 햇살이 산등성을 올라타고 바위를 올라타고, 나무들을 올라타고 와 풀밭에서 스러졌다. 산그늘도 내리지 않는 아침이었다. 바라보는 동안 무엇에도 걸림 없는 무한의 침묵이 밀려왔다.
--- p.87, 「인제 한계사 터」 중에서
햇살이 밀고 들자 밋밋했던 광배에 뭔가 얼비친다. 눈을 의심했다. 부처다. 빛의 각도에 따라 자태를 더욱 선명히 가다듬는 부처 앞에서 넋을 놓는다. 원형의 대좌엔 어느새 손바닥만 한 새끼 사자가 도드라져 웃고 있다. ‘어디서 왔을까 부처와 저 짐승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느
세계에 있다가 아침 설법을 위해 새끼 사자를 앞세워 온 것일까.’ 비록 인적은 없고 법향은 끊어졌다지만, 산[生] 짐승과 만물을 위해 부처는 매일 이곳에서 만萬 가지 언어로 설법을 전하고 있었던 것일까.
금당지를 천천히 거닌다. 초석과 기단의 면석, 형상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마멸된 불상과 사자상, 네 송이의 연화문을 일정치 않게 조각해 놓은 연꽃 석상이 각자의 자리에서 점점 도드라진다.
저만치 바닥에 부처가 앉아 있다. 풀밭에 두루뭉술하게 솟아 있던 투박한 바위, 음영에 도드라지는 몇 줄의 법의法衣 무늬를 확인하고서야 불두가 사라진 부처라는 것을 깨닫는다. 대좌에 올라 있어야만 부처라는 선입견이 무색해진다. 부처는 풀밭에 있어도 부처였다. 세상에 높고 낮음을 정하고 귀하고 천함을 따지는 인간의 무지함이 부끄럽다. 오래전, 선명하게 음각했을 법의는 바람에 묻어 옅어지고 불두마저 세상 어딘가로 돌려보낸 부처는, 있는 듯 없는 듯 자연과 더불어 바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려는 듯 한없이 자연스럽다.
--- p.94, 「인제 한계사 터」 중에서
이제 ‘사지寺址’는 ‘사지死地’로 변하여 풀밭에 들었다. 한때는 수많은 승려가 기거했다는 절의 흔적은 고작 물확 2개와 석축과 기와 조각, 주춧돌 몇 개가 전부다. 우리가 문화에 무지했을 때, 문화적인 것보다 먹고사는 것이 시급했을 때, 누군가는 이곳을 찾아 쓸 만한 것과 돈이 되는 것을 함부로 거둬갔을 것이다. 그것이 어디로 가 어떻게 위치하고 있을지 모르나, 우리의 빈곤했던 과거의 단면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이 어디에서 영원한 적멸을 꿈꾸는지 모르나, 사람이 고향을 그리 워하듯 말 없는 그것들도 원래의 자리를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따금 풀밭 사이로 보이는 기와나 깨진 그릇 조각이 반갑다. 아무것도 없는 풀밭이라지만 이 얼마나 많은가. 절터를 상징할 만한 석탑도, 석등도, 부도도 하나 변변히 남아 있지 않은 초라한 절터라지만, 꼭 무엇이 뚜렷이 남았어야만 한다는 생각은 버린 지 오래다.
빈 절터에서 어찌 눈으로만 위안을 얻으려 하는가. 없으니 허전하고, 없으니 쓸쓸하고, 없으니 초라하다는 마음은 버리고 다시 저 빈 공 간을 보라. 그윽해지는 찰나의 부유함, 비워진 것에서 그윽해지는 순간을 보라. 허허벌판 이 너른 풀밭에서 느끼는 공허와 적막, 적멸, 황량함. 넉넉히 누릴 수 있는 공간적 느낌은 이곳 운흥사 터가 유일할 것이다. 천년의 시간이 머무르고 있는 저 풀밭에 나는 특별할 것도 없는 한 종種으로 섰다. 같이 호흡하고, 같이 흔들리는 종으로.
신발을 벗고 천년의 그때처럼 다시 첫발을 들인다. 발바닥에 닿는 풀의 감촉이 연하다. 풀 끝에 매달린 빗방울이 온몸으로 달려들어 나는 금방 젖고 만다. 너도, 나도 같은 자연의 한 점 존재가 되었으니 소곤거리는 풀들과 벌레들의 말이 멀지 않다.
--- p.313, 「울산 운흥사 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