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버리에 도착해서야 마침내 자전거 가게 하나를 찾아냈다. 먼지 낀 가게 창문에 붙어있는 전단지가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진짜 종이로 만든 전단지가 있었다! 한 전단지에는 직접 손으로 쓴 문구가 적혀있었다. ‘먹을 것이 부족하다고요? 작물을 직접 재배하는 법을 알려드립니다! _ 트랜지션 타운 워크숍.’
순간 엄마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뉴트리움 서스테이트엔 네 몸에 필요한 영양소가 균형 있게 들어있단다. 레콘을 먹어야 해.’
‘야생 음식을 먹으면 식중독에 걸릴 거야. 파이퍼, 안전한 먹거리를 고수하렴.’
--(중략) --
야생 음식에 얽힌 끔찍한 이야기에도 심지어 엄마조차 음식을 구하기 위해 올스타 슈퍼마켓 앞에 길게 줄을 선 인파 속으로 뛰어들었다. 물론 성과는 좋지 못했다. 지난주에 시작된 사재기 폭동 이후 수퍼마켓의 선반은 텅 비어버렸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석유 값 폭등으로 식료품의 운송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간신히 도착한 식료품들은 순식간에 동이 났다.
손목 밴드로 워크숍 전단지를 사진으로 찍었다. 우리 집에는 정원이 없다. 그저 듬성듬성 잔디가 난 앞마당, 그리고 창고와 집 사이에 있는 콘크리트 마당이 전부다. 하지만 그래도 작물을 재배할 수 있지 않을까? 화분에서 기르는 건 어떨까?
--- pp.32-33
그다음 무심코 고개를 들었는데 오, 이런! 모두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말 그대로 모두가! 심지어 선생님까지도 말이다! 대체 무슨 일이지? 옆자리에 앉은 브리아나를 쳐다봤다. 브리아나의 입 모양에서 “파이-퍼, 파이-퍼…” 하고 거듭 부르는 외침을 읽어낼 수 있었다.
모두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얼굴로 열이 확 오르고 맥박이 갑자기 뜀박질하는 게 느껴졌다. 도움이 절실한 이런 순간에 테일러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무슨 일이야?”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를 비웃고 있었다.
브리아나가 무어라고 말하며 선생님을 몸짓으로 가리켰다. 리사 선생님 역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선생님의 입술이 움직였지만, 내가 알아챈 단어는 오직 발표뿐이었다.
발표할 차례라고 누구라도 내 어깨를 두드려서 알려줄 수는 없었을까? 테일러 말고는 아무도 건드릴 엄두를 못 낼 만큼 내가 그렇게 혐오스러운 걸까? 선생님조차도?
이런 상황을 더는 견딜 수 없다. 테일러 없이는 학교에 있을 수 없다. 테일러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눈을 깜빡이며 최대한 어깨를 쫙 펴고 일어섰다. “물론이죠. 첫 번째로 발표해도 상관없어요.”
--- pp.51
… 이 단어를 쓰는 맥락을 고려했을 때 일류는 인류라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플라스터는? 왜 이 말을 했지? 대화에서 잘 쓰는 단어가 아닌데. 분명히 다른 단어일 거다. 뭘까? 플라스틱? 맞다, 그럴 확률이 높다. 좋아, 그렇다면… 우리는 인류 역사 내내 진짜 음식을 먹어왔어. 야생 음식을 먹도록 진화해왔다고. 상자에 들어있는 플라스틱 같은 것보다 진짜 음식이 우리 몸에 이로운 거야. 레콘을 말한 것이리라.
“하지만 레콘을 먹고 식중독에 걸렸다고 보고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는걸.” 내가 반박했다.
“그렇긴 하지. 하지만 지금 아이들이 에너지결핌증우군이나 천시 같은 병을 앓고 있잖아.”
에너지결핍증후군. 천식. 세스풀은 결국 뉴스를 통제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 하지만 학교에서 봤던 기사가 떠올랐다. 그저 강박에 사로잡힌 일부 부모들의 염려일 뿐이라고 우리를 안심시키는 기사였다.
“레콘을 먹는다면 왜 은식을 기르는 법을 배우고 싶은 거지?”
“그걸로는 부족해서. 요즘 오가닉코어가 레콘을 절반 정도만 배달하고 있거든. 뭐가 됐든 먹을 게 충분했으면 좋겠어.”
“그럼 우리 엄마를 한번 만나보는 건 어때? 우리 엄마는 농인이신데, 한 번도 레콘을 머근 적이 없으셔. 먹을 수 있는 작물을 재배하는 법을 너한테 가르쳐주실 수 있을 거야.”
--- pp.70-71
면접관이 고개를 저었다. “… 그렇게는 하지 않아요. 우리 기관에서는 자동적으로… 때문에… 모두가 …을 하죠.”
“자동화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고 말씀하신 건가요?”
면접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시스템을 바꿀 수도 있겠네요. 그러면 듣지 못하는 다른 사람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세스풀은 그럴 생각이 없다는 게 면접관의 표정에서 명백하게 드러났다. “당신 한 사람만을 위해서 특별한 시스템을 만들 순 없어요.”
느릿느릿 페달을 밟아 집으로 향했다. 기운이 없었다. 뭐든 먹어야 했다. 빌어먹을! 그 많은 문항에 답을 채우느라 엄청난 시간을 허비했건만. 이럴 거면 대체 왜 처음부터 명시하지 않은 거야?!!
청각장애인은 고용하지 않습니다. 지원하지 마세요.
--- pp.116
말리는 마치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얻은 권리를 거부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마치 청각장애인인 것이 내 정체성의 아주 중요한 부분인 것처럼, 그래서 내가 다른 청각장애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는 청각장애인이라는 것이 주근깨를 가지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너무나 당연해서 시간이 흐르면 의식하지 않게 되는 무엇이라고 여겼다. 주근깨가 있는 사람들은 다른 주근깨가 있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려고 하나? ‘그게 중요해?’ 내가 물었다.
‘그건 네가 결정할 일인걸. 하지만 너에게 좀 고된 일이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어. 알잖아, 친구를 사귀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고, 네가 들을 수 없는 세상에 스스로를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 말이야. 다른 농인들과 함께한다면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경험을 나눌 수 있어. 서로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공동의 언어를 사용해서 말이야.’
솔직히 말하자면, 그건 정확하게 내가 노스코트 고등학교에 가는 걸 거부해온 이유였다. 로비와 함께 시간을 보낼 때 나를 전율하게 한 부분이기도 했다.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의식하지 못하거나 혼란을 느끼는 유일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로비가 음성으로 말하려고 할 가능성이없으며 만약 의사소통하고 싶다면 시각적으로 다가올 거라는 걸 알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직업 선택의 기회를 제한당한 유일한 사람이 아니며, 그로 인해 겪는 좌절감을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전율하게 했다.
--- pp.239-240
“그게 무슨 뜻이야? 두통이 이 일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거니?”
“왜 두통이 생기는지 알아냈어요. 말 읽기 때문이에요! 수어를 할 때는 두통이 생기지 않는다고요.”
“하지만 학교 밖에서도 말 읽기를 하잖아. 방학 중에도 그랬고. 또 방학 땐 두통을 겪지 않잖아.”
“학교에서는 집중해서 말 읽기를 해야 해요, 하루 종일 말이에요!”
엄마는 납득하지 않았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엄마의 눈가가 반짝였다. “그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내가 널 제대로 키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않겠니? 언어 치료를 받게 할 만큼, 그리고 진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할 만큼 너를 충분히 신경 쓰지 않았다고 말이야.”
엄마는 무너지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파이퍼. 난 너에게 모든 걸 줬어. 내 모든 걸. 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능력을 키워주기 위해서 말이야. 네가 그걸 전부 아무렇지도 않게 내팽개칠 수는 없어!”
“내팽개치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더는 말할 수 없었다.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 역시 울고 있었다. “엄마…, 엄마도….” 딸국질을 하며 말을 더듬었다. “배울 수 있어요. … 수어 쓰는 법을 말이에요.”
엄마는 더욱 크게 울었다. “나는 너무….” 말이 더 이어졌지만, 엄마가 얼굴을 두 손에 묻어버려서 다음 말을 놓치고 말았다.
--(중략) --
엄마에게 다가가서 무릎 위에 앉고 목을 껴안았다. “죄송해요.” 애초에 이런 상황을 만들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수어를 포기하고 엄마가 바라는 ‘평범한’ 딸이 되겠다고 약속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건 내가 아니었다.
--- pp.316-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