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시대, 계속되는 전쟁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부상 환자들에 비해 병동이나 구급약은 턱없이 부족했다. 전장의 군의관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계급이 높은 사람이나 공적이 많은 사람을 우선적으로 치료할 것인가? 아니면 부상 정도가 심한 병사를 먼저 치료할 것인가?
트리아주, 과연 누구를 먼저 구할 것인가. 우선순위를 두고 딜레마에 빠지면서 트리아주는 의학계에서 주로 사용하는 용어가 되었다.
--- p.30
정의도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한다. 흐름을 거부하거나 역행하는 정의는 도태될 수밖에 없다. 현재의 변화에 집중하지 않으면 정의는 이리저리 표류하며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바라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선 정의도 변화를 수용해야 한다. 때늦은 정의라는 비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수시로, 정의의 방향을 변화의 틀 안에서 점검해야 한다.
--- p.57
이타심의 기저에는 타인이 존재한다. 이타적 행위를 통해 서로의 유대감을 높여주게 된다. 나아가 공동체를 유지하는 동력이 된다. 그러나 정의에서 벗어난 이타심은 어쩔 수 없이 공동체 중 누군가를 훼손하게 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이타심은 언제나 정의의 틀 안에 있을 때, 본래의 의미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불의한 이타심은 이기심을 가장한 행위에 불과하다.
정의로운 이타심만이 공동체를 향한 빛나는 가치가 된다.
--- p.64
공짜에는 어떤 식으로든 저의가 담겨 있다. 작은 공짜일지라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작다는 이유로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습관이 되어 버린다는 사실을 한 번쯤은 경험해 봤을 것이다. 습관은 판단보다 빠르고 강력하다. 공짜 속에 담긴 의도를 파악하기 전에 몸이 먼저 요구하고 반응한다. 결국 사소한 공짜를 엄중히 다루지 못했을 때, 습관은 함정이 되어 불법을 저지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 p.80
내부 고발이 소중하게 받아들여져야 정의는 단단해지는 것이다. 설사 자신은 용기가 없어 나서지 못할지언정 삐딱한 시선으로 내부 고발자를 바라보는 태도부터 멈춰야 한다. 또한 내부 고발에 대해 비겁하게 관망하는 자세도 버려야 한다. 그들의 용기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공감하여야 한다.
--- p.114
정의는 인내의 산물이기도 하다.
욕망을 억제하며, 타인을 배려하고 인내하며, 정해진 법도와 관례에 따라 합당한 차례를 기다리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새치기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이기적 행위라는 것이다. 자신의 권리를 앞세우고 새치기를 당한 타인의 입장을 고려치 않는 것이다.
질서를 지키는 자세, 새치기를 하지 않는 태도는 정의의 한 모습이다. 왜냐하면 타인에 대한 존중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 p.122
입사 면접에서 부모의 직업을 묻는 것은 채용의 공정성을 침해하는 행위이다. 직무 수행과 무관한 개인정보를 수집 또는 요구해서도 안 된다. 구직자 본인과 직계존비속, 형제자매 등의 용모, 키, 체중, 출신 지역, 결혼 여부, 재산, 학력, 직업 등 개인정보를 채용 심사 자료에 기재하도록 하거나 제출을 요구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제도적 장치로 그간 만연했던 계층 간의 갈등은 해소되었을까?
또한, 기회의 불균형이 사라진 공정한 경쟁 사회가 되었을까?
오히려 깊숙이 숨어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어느덧 일상 용어처럼 자주 들리는 ‘아빠 찬스, 엄마 찬스’가 이를 증명한다.
--- p.166
가짜 뉴스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도 이와 비슷하다. 가짜 뉴스 생산자는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 더불어 가짜 뉴스를 분별하는 우리의 양식도 돌아봐야 한다.
가짜 뉴스의 잘못된 정보와 사실 왜곡이 무서운 것은, 불신 때문이다.
가짜 뉴스의 범람은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게 만든다. 이러한 불신이 계층과 집단 간의 갈등이 된다.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 사회적 불안은 심각해진다.
--- p.181
갑질은 특별한 위치에 있는 사람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누구나 범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도 저지를 수 있는 행위이다. 상사가 부하직원에게, 그 부하직원이 알바생에게, 그 알바생이 아파트 경비원에게……. 어떤 분야에서나, 누구나 해당된다. 인간관계 혹은 다양한 상황에서 우월한 지위에 놓이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타인에 대한 갑질은 물론이거니와 내 안의 갑질에도 경계의 끈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 p.213
우리는 왜 사회적 정의를 외치는가? 공공의 정의가 지켜질 때 개인의 권리가 보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공의 정의를 위협하는 요소는 결코 나와 무관한 일이 아니다. 둘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당장 피해가 없다고 침묵하는 건 옳지 않다.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불의를 보고 정지 상태로 있거나 도망칠 일이 아니다. 불의와 맞서 싸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하다.
--- p.251
올바른 신념은 반드시 올바른 행동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일까?
정의는 반드시 정의로운 행위가 수반될 때 가능한 것인가?
정의가 그렇게 엄중한 것이라면 과연 실천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그야말로 관념의 세계 속에서나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현실적인 대안은 없을까?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불의에 빠지지 않는 것만도 정의이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것도 정의를 실천하는 행위이다.
또한 불의한 유혹을 이성과 도덕으로 절제하는 것도 정의이다.
엄중한 정의보다는 오히려 사소한 정의가 더더욱 소중한 이유이다.
--- p.2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