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26일 새벽 3시, 하이난 산야 공항Hainan Sanya Airport. 4일간 개최되는 ‘보아오 포럼’ 참석을 위한 여행 중이었다. 입국 심사 지연으로 막연히 기다리던 중 급피로감이 밀려왔다. 나도 모르게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왜 나는 이렇게 세상을 다니며 사람을 만나려고 하는가?”
그 질문에 중국의 철학자 진커무가 쓴 ‘사람을 읽는 글’이 문득 떠올랐다. 칠흑 같은 새벽의 어둠 속을 달리던 택시 안에서 낯선 불안과 급습한 피로감이 덮친 그때에 말이다.
“독서란 문자로 된 글을 읽는 행위만이 아니다. 말을 듣는 것도 일종의 독서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그건 ‘사람을 읽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곧 사람을 읽는다는 것이며, 거꾸로 사람을 읽는 것은 독서의 일종이다. 사람을 읽는다는 것은 사물을 읽는 것이고 세상을 읽는 것이다.”
---「프롤로그」중에서
다툼도 여러 가지 다툼이 있을 수 있겠죠. ‘너는 저렇게 생각하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분명 서로 다르지만 괜찮아요. 대화를 나누며 서로 다름을 생각하고, 오히려 내가 더 옳다
고 느껴질 수도 있어요. 혹은 얘기하다가 ‘저 사람의 의견도 말이 되는구나, 네가 맞고 내가 틀릴 수도 있겠다’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어요. 혹은 나에겐 이것이 맞고 너는 저것이 맞을 것 같다면, 합쳐서 더 좋은 게 나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다툼이 꼭 나쁜 것 같지는 않아요. 물론 치고받고 싸우면서 ‘네가 틀리고 무조건 내가 옳다’고 하는 다툼은 잘못되겠지만 오픈 마인드로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데서 나오는 다툼은 오히려 Healthy, 건강한 토론이라고 생각해요. 남들을 배척하고 나만 맞고 너는 틀렸다고 생각하는 순간, 결국 자기 무덤을 파는 거죠. 다 자기 구멍 안에만 있어서 ‘나는 이게 맞아, 넌 틀려’ 하며 무덤에 스스로 들어가는 거죠.
---「미국 UCLA 기계공학과 교수, 데니스홍」중에서
제가 섬김의 리더십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처음 말할 때, 사람들은 종종 혼란스러워하죠. 사람들은 섬김의 리더십이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하는 리더 또는 어떤 종교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사람들을 이끌면서 동시에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섬김의 리더십이 위대한 성과를 고취하고 지대한 인간적인 충족감을 창출해 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어요.
---「리더십 구루(GURU), 켄 블랜차드」중에서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대학들이 부유한 가정의 자녀들을 계속 부유하게 돕고, 가난한 가정의 자녀들은 계속 가난하게 하는 시스템을 이어가고 있어요. 이는 도덕적으로 매우 부끄러운 일이에요. 캠퍼스를 유지해야 하고 이에 대한 지원을 위해 돈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이미 캠퍼스를 지었기 때문에 이는 매몰 비용이에요. 과거 비용이죠. 빌딩을 팔던가 없애야 해요. 빌딩을 철거하고 학비를 내려야 해요. 그렇게 해서 접근성을 확대해야 하죠. 전 세계 소득 상위 1%의 자녀들이 아이비리그대나 스탠포드의 52~55%를 차지하는 사회는 존재할 수 없어요. 이렇게 되면 사회가 부패해요. 미네르바대는 이렇게 하는 것을 거부해요.
---「미네르바스쿨 창립자, 벤 넬슨」중에서
코로나19로 인해 우리가 강제적으로 격리된 상태예요. 니체는 세상에는 진리에 이르는 수많은 길이 있는데, 그중 가장 험난하고 먼 길은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어요.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다 보니 초반에는 많은 사람이 힘들어했어요. 타인들과 교류하고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존재인 우리이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교류가 단절될 때 느끼는 외로움을 극복하려면, 결과적으로는 사회적 거리두기 속에서 자신과의 거리두기도 필요해요.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은 결국 자기를 객관화시키기 위한 거리두기의 필요이고, 성찰의 기본적인 전제 조건이죠. 자기 자신을 객관화시키지 않고서는 스스로를 잘 알 수가 없어요. 강제적으로 고립된 이 시간이지만, 긍정적 의미에서의 고독을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선물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석좌교수, 이진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