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 감성인가?
감정(感情) 혹은 정서(情緖)라고 불리는 것들, 그래서 뭉뚱그려 감성(感性)이라고 부르는 것들, 그런데 왜 지금 그러한 것들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감성이 인간의 삶, 특히 현재적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본질적인 매개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 것들로 인해 다시금 우리 삶의 본질을 되돌아볼 수 있고, 희미해져 가는 인간성(人間性)을 찾기 위한 몸부림에 답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그러한 감성 혹은 감성적인 것들이 우리 삶의 질을 어떻게 높일 수 있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그런 과정에서 거기에는 일정한 메커니즘이 존재할 것이며, 그것을 작동하게 하는 기제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할 것이다. 더불어 그 추측의 결과로 감성을 내세울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감성의 메커니즘과 기제의 작동 원리를 탐색해야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규명해야 하는 것 등을 감성 연구의 본질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인지과학에서 감성에 대해 요구하는 것 역시 이와 별반 다를 바 없다. “명시되어 있지 않은 정보와 암묵적으로 인간이 실행하는 적절한 처리, 감정ㆍ인상에 동반하는 개인차ㆍ상황차를 포함하는 ‘직감적이고 애매한’ 감성 판단 등, 인간의 다양한 정보 처리의 본연의 모습에 관심을 가지고, 그 배후에 있는 메커니즘의 검토”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문학과 인지과학의 사이에서 그 차이가 있다면 이는 ‘관심의 대상’ 정도가 될 수 있겠다. 즉 ‘정보 처리’에 관심을 두느냐, 아니면 인간의 ‘마음 구조’에 관심을 두느냐의 차이 정도일 뿐인 것이다.
우리가 특히 ‘감성’을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정서나 감정과는 다른 차원의 ‘마음 구조’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즉, 기왕의 연구 대상이 되어 온 ‘Emotion’의 번역 용어들과는 다른 개념의 어떤 것으로 본다는 전제를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Emotion’을 감성과 동일한 개념으로서의 주된 연구 테마로 삼아 버린다면, ‘감성 연구’라고 칭하는 통섭 연구들의 의의 자체가 상실되어 버릴 위험이 있다.
왜냐하면 ‘정서심리학’ 등의 학술 용어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것과는 다른 어떤 것을 감성으로 지정하고 연구해야 하는 목표 자체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또한 그럴 경우 서양의 ‘Emotion’에 관한 모든 연구가 감성 연구 그 자체였다고 인정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데,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감성 연구와는 별개의 것임을 인지하지 못한 데서 비롯한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최근 일부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정서=감성’의 등식을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하는 관점에서의 성과를 내어놓고 있다. 이들 연구물에서는 대부분 감정, 정서, 감성이라는 용어를 구분하지 않고 쓰겠다는 연구자의 주관적 판단을 전제하거나 혹은 정서와 감성을 구분하지 않고 문맥에 따라 자연스럽게 혼용하겠다고 당당히 밝히는 모습까지 볼 수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마음’에 관련한 그 모든 것들을 ‘감성’이라고 통일하여 사용하지는 않는가.
결국 이런 식의 담론을 계속 허용한다면 우리가 이 시대에 감성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과 지금까지 이야기되어 온 정서담론 사이에서 그 어떠한 차이도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시대의 감성담론이 무력해질 따름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이것들과 관련한 이전의 연구 성과들을 이 글에서는 더 이상 상관하지 않는다. 감정, 이성, 정서 등에 관한 개별 연구는 이미 필요한 또는 해당하는 전공 영역에서 일정 이상의 연구 성과를 내놓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성’에 대하여는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로 단순히 ‘감성’이라는 용어만을 차용한 연구 성과를 이 글에서는 단호히 거부하고자 한다. 물론 필요에 의해 비슷한 개념의 경우는 언급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 자체마저도 자제하면서, 그에 관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반론을 기대하는 것이 우리 식의 감성 연구를 시작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식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구의 시작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먼저 감성을 재단하거나 수치화하고, 계량화하려는 의도의 위험성을 감지하여, 그것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감성마저도 과학이라는 미명 아래 그것이 해석되어야 할 그리고 반드시 규명되어야 할 어떤 ‘사실’이어야 하지는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감성의 측정이라든지 감성 용어의 분류라든지 하는 연구의 경향들이 대개 이에 해당한다.
특히 이들 연구에서 말하는 연구 대상으로서의 감성은 ‘감정’이거나 혹은 ‘정서’이거나 둘 중의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그러한 연구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에 대한 접근 방식이 잘못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학문적으로 과학이 최상위 영역이라는 이상한 자부심이 인문학적인 것들마저도 그런 식으로 해석하려는 가운데 나온 시도들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 말하는 ‘통섭’은 문제가 있다. 그것은 통섭이 아닌 오히려 ‘포섭’에 불과하다. 진정한 통섭은 그 어느 것 하나도 하위에 있을 수 없는, 균형적 위치에서 대등하게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형성되어야 한다. 특히 인문학이나 예술이라면 해석이 아닌 창발의 관점에서 이것저것들의 대입과 적용, 충돌, 갈등, 모순 등의 해석과 극복 지점의 모색을 통해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하는 학문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본다면 감성 혹은 감성적인 것들은 그런 차원의 세계를 열어 줄 이 시대의 새로운 학문적 화두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감성의 오독(誤讀)’, 혹은 ‘조작된 감성’ 역시 경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감성의 집단성보다는 개별성, 혹은 개인적 감성을 먼저 생각해야 할 일이다. ‘나의 마음’을 추동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래서 발현된 나의 마음 상태는 또한 어떠한 것이었는지 대해 다시금 곱씹어 보아야 한다. 알 수 없는 그러면서도 저항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 조작된 감성 혹은 감성적인 것들이 ‘나’를 대신하여 내 마음을 채우지 않았는지, 혹여 그러한 것들이 나로 하여금 이 세계를 불가항력의 어떤 시선으로 인식하도록 하지는 않았는지 세밀하게 관찰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제1장 감성의 본질」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