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가 된 후에는 강의와 연구 외에도 신문 잡지에 기고를 활발히 했다. 메이저 신문에서 8년 동안 비상임 논설위원을 지내면서 그 매체의 힘을 빌려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의 시각에서 우리 정치와 사회를 지켜보았고, 결국에는 정치 일선에 서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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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민간방송을 하고자 하던 김지태(金智泰: 1908~1982)가 방송 허가를 인수해서 문화방송이 탄생한 것이다. 김지태는 당시 민주당 정권 시절이니까 명망가이자 장면 총리와 친분이 있는 외조부를 회장으로 모시고, 본인은 사장으로 실제로 방송사를 운영했다. 나의 아버지는 투자금 상당액을 회수해서 후에 다른 사업을 시작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방송국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일을 벌여서 중도에 그만두고 말았다고 하셨다. 여하튼 이런 연유로 문화방송 초대 회장은 외조부로 기록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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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외조부는 일제 식민 통치를 싫어했고, 북한 공산주의와 이승만 독재정치에 반대했다. 그런 점에서 4·19 후 1년간은 외조부가 평생 희망하고 추구했던 세월이었다. 이런 경험으로 인해 나는 어떻게 해서 이승만 정권이 독재의 길을 갔고, 어떻게 해서 4·19가 일어났고 또 5·16이 일어났는가에 대해 일찍부터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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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도 〈타임〉을 통해서였다. 타임을 구독하기 시작한 1970년은 미국에 있어서 환경 원년(元年)과 같았다. 1970년에 환경보호처(EPA)가 발족했고, 대기정화법(The Clean Air Act)이 의회를 통과했기 때문이다. 민간운동으로 ‘지구의 날(Earth Day)’ 행사가 시작된 해도 1970년이었다. 〈타임〉에 나온 환경과 생태에 관한 기사를 통해 나는 환경문제에 대해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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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에 나는 빈곤퇴치를 위한 강력한 복지대책을 촉구했던 경제학자 군나르 뮈르달(Karl Gunnar Myrdal: 1898~1987)이 옳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인구의 절반이 흑인이던 뉴올리언스에서 공부하던 중 그런 생각은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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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어느 도시나 루스벨트의 뉴딜과 존슨의 ‘위대한 사회’ 정책으로 건설된 낡은 공공주택은 심각한 도시문제가 되어 있다. 나는 그때부터 정부가 임대주택을 건설하기보다는 개인이 아파트를 살 수 있도록 주택청약예금과 주택부금 제도를 도입한 박정희 대통령이 현명했다고 생각하게 됐다.
---pp.100,101
내가 정말 말하고자 했던 바는, “사외이사를 하는 교수나 변호사가 기업에 관한 중요한 정책 결정을 하는 정부 위원회의 위원을 겸한다면 심각한 이해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는 한 문장이었다. 다음 날 다른 신문들은 환경운동의 도덕성이니 뭐니 하는 사설을 썼는데, 바다에 배 지나가듯 아무 영향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집어넣은 한 문장 때문에 총리실과 청와대가 발칵 뒤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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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이 저물어 가면서 이명박 세력은 이미 관료와 재계, 그리고 언론을 장악해 나가서 오픈 프라이머리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한나라당에서 해 오던 당원과 대의원 중심의 경선으로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면 박근혜 전 대표가 후보가 될 것이기 때문에 이명박 측에선 실현 가능성이 없는 오픈 프라이머리를 내세우고 언론 플레이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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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로스쿨 도입으로 변호사들의 수준이 저하되는 부작용이 생겨났다. 사법시험이 있었을 때 사법연수원 교육은 매우 강력한 것이었는데, 그게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면 서울대와 고려대의 법조계 패권은 없어졌나 하면, 그것도 아니다. 사법시험 시절에는 법대가 뒤처져 있던 연세대가 로스쿨을 하면서 올라서더니, 서울대, 고대, 연대 로스쿨 졸업생이 판검사, 로펌을 장악하는 ‘SKY 로스쿨 세상’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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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전 대표가 종합일간지와 단독 인터뷰를 한 것은 2007년 대선 이후 4년 만이었다. 박 전 대표가 다시 일선에 나설 것으로 예상되어서 많은 언론사가 인터뷰 신청을 넣어 놓은 상태였는데, 박 전 대표가 경향신문에 연락해서 이상돈·김호기 교수와 하는 ‘대화’로 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이 대담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기사가 나가자 다른 신문들이 항의하는 등 난리가 났다.
---p.231
어느 날 무슨 일로 캠프 총괄본부장인 최경환 의원을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안종범 의원과 수행비서를 하던 안봉근이 함께 있었다. 그런데 안봉근과 최경환이 서로 말을 놓는 투로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래서 홍사덕 전 의원한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깜짝 놀라고 기막혀했다.
---p.263
수소문을 해서 최고회의 총무수석으로 박정희 의장을 수행하고 독도를 다녀온 최영섭 예비역 대령을 만나 뵈었다. 당시 88세로 일산의 큰아드님 댁에 살고 계시던 최영섭 예비역 대령은 박 의장이 탄 함정은 독도 부근은 가지 않았지만 “독도를 박정희 대통령만큼 생각한 대통령은 없다”면서 문재인 의원의 주장이 말도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영섭 예비역 대령은 최재형 감사원장의 부친이다.
---pp.269,270
내가 이렇게 박근혜 전 대표의 의중을 암시하는 발언을 의도적으로 한 이유는 새누리당 의원들에게도 메시지를 전달하고 또한 속사정을 잘 모르는 MBC 노조원들에게 암묵적 신호를 보내기 위함이었다.
6월 22일 복지관 발언으로 박근혜 전 대표의 생각이 확인되자, 박성호 기자는 박지원 원내대표를 만나서 MBC 파업 국정조사 요구를 철회해 달라고 했다. MBC 파업에 대한 야당의 국정조사 요구가 사라짐에 따라 개원 협상은 급물살을 탔고, 6월 29일에 타결이 됐다.
---p.286
2013년 여름과 가을을 거치면서 나는 박근혜 정부가 4대강 사업과 MBC 문제에 대해 전향적인 변화를 전혀 보이지 않는 데 대해 깊이 실망하게 됐다. 사실 이명박 정권이 남긴 가장 부정적인 영향은 4대강 사업과 MBC 문제였고, 나는 박근혜 대통령이 4대강 사업과 MBC 문제에 대해 이명박과 다르다고 생각해서 한 해 동안 정치적 행로를 같이했던 것이다.
---p.307
돌이켜보면, 박 의원이 문재인 의원의 말을 너무 믿은 것이 잘못이었다. 문재인 의원은 처음에는 동의했다가 주변과 지지 세력이 반대하니까 물러나고 만 것인데, 그나마 내가 그 부분을 커버해 주어서 파동이 더 이상 커지지 않았다. 아마도 친노를 계승한 친문 세력은 안철수-김한길 공동대표 체제에 이어서 박영선-이상돈 공동 체제로 이어지면 자신들의 당내 입지가 약화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p.315
2016년 총선에서 제3당을 표방한 국민의당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호남에서 너무 큰 지지를 받은 것이 오히려 발목을 잡았다고 생각한다. 호남에서 의석을 잃더라도 김한길, 김영환, 문병호 의원이 원내에 들어와 주고, 수도권에서 한두 명이라도 초선을 당선시켰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p.335
김병준 총리 기용에 제일 당황한 사람은 그를 비대위원장으로 끌고 오려던 안철수였는데, 안철수는 그것을 박근혜 하야 요구로 돌파했다. 안철수가 당 대표급 중에서 박근혜 사퇴와 탄핵을 제일 먼저 들고 나간 데는 김병준 때문에 당내에서 처한 곤란한 지경을 돌파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야당과 대화를 하겠다고 김병준을 총리로 지명한 박근혜 대통령은 야당으로 하여금 탄핵을 추진하도록 스스로 무덤을 판 것이다.
---p.362
바른미래당은 처음부터 안철수가 서울시장 선거를 나가기 위해 만들었던 ‘1회용 플랫폼’이었다. 국민의당은 호남당 색깔이 진하니까 바른미래당 후보로 나가면 당선이 된다고 생각한 것이고, 서울시장에 당선되면 4년 후 대선에 나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과는 예상대로 또 3위였으나 득표율은 15%를 넘겨서 선거비용을 전액 보전받았다. 국민 세금을 선거 보조금으로 받고, 또 되지도 않을 선거에 나간 선거비용을 국민 세금으로 보전받았다. 그러니까 바른미래당은 국민 세금을 빼먹기 위해 만든 1회용 정당이었다.
---pp.383,384
비례대표 의원을 제명하지 않는 이유는 순전히 돈 때문이다. 비례대표 의원을 제명해서 교섭단체가 무너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정당에 주어지는 보조금이 소속의원 숫자에 비례해서 지급되기 때문에 비례대표 의원을 제명하면 그만큼 정당 보조금이 줄어들게 된다. 그래서 한사코 제명하지 않았던 것이다.
---pp.385,386
환경노동위원회에서 4대강 사업의 폐해, 내성천과 영주댐 문제, 풍력발전으로 인한 자연파괴, 석포제련소 문제, 흑산공항 문제 등의 환경 사안, 그리고 MBC 노조 탄압, 비정규직 방송 작가와 아나운서의 노동인권 문제 등을 다루었다. 나는 고용노동부 산하에 있는 한국폴리텍대학이 4차 산업 교육 훈련 기관으로 탈바꿈하도록 성원했고, 장애인 고용이란 어려운 일을 담당하고 있는 한국장애인고용공단에도 힘을 실어 주었다
---p.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