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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나는 당신을 처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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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동네 시인선-153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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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6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120쪽 | 180g | 125*205*8mm
ISBN13 9791158965174
ISBN10 1158965176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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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길다는 건 좋은 것이죠.
머리숱이 많다는 것도 좋은 것이에요.
자를 수 있는 머리가 없었다면
난 유방을 잘랐을 테니까요.

어느 날 환자가 내 가슴을 움켜잡았죠.
난 주사를 놓으러 다가갔을 뿐인데
그놈은 그냥 한번 잡아봤다고 웃으며 말했죠.

성추행 당하셨어요? 네.
누가요? 제가요.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죠. 뭐, 뭐, 뭐라고요?

짧게 잘라주세요. 남자 머리처럼 아주 짧게요.

내 머리카락은 검은 비가 되어 미용실 바닥을 적셔요.
철벅 철벅 서글픈 소리로 머리칼이 울어요.
이봐요. 내 머리카락을 밟지 말라고요.
흙탕물을 뒤집어쓰는 기분이 드니까.

다음날 정신과를 찾아갔죠.
하지만 의사의 처방전엔 난 한낱 여자일 뿐이었어요.
나와 같이 자고 싶다나요?

더 짧게 잘라주세요. 남자 머리처럼 아주 짧게요.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더 더 더 더 더 짧게, 나를 거세시켜 달라고요.

2인치의 머리로 거리를 나섰어요.
아직도 내가 여자로 보인다구요?
다음엔 진짜 가슴이나 엉덩이 한쪽을 도려내야겠군요
--- 「숏컷」
――――――――――――――――――

콜라 같은 날 낳고 엄마는 행복했을까.
하얀 피부를 가진 아이들이 다가와 넌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묻는다. 넌 콜라라며 콜라가 사는 나라로 가버리라고 한다. 나는 모래더미 속에 얼굴을 묻는다. 나만 홀로 캄캄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엄마는 콜라병 속에 날 가둔다.

콜라병 속의 내가 콜라병 밖의 엄마를 본다.
엄마는 콜라 같은 어둠 속에 홀로 빛을 꿰어 넣는다. 엄마의 눈물 같은 빛이 콜라병 속으로 스며든다. 나는 울면 안 된다는 것을 배우기 위해 학교에 간다. 사이다 같은 아이들이 내 주위를 맴돈다. 넌 콜라라며 톡 톡 톡 쏘아댄다. 돌멩이를 던져댄다. 난 콜라병 속에 다시 나를 가둔다. 엄마가 만들어준 콜라병. 아프지 않을 콜라병.

콜라병 속의 내가 콜라병 밖의 세상을 본다.
툭 툭 툭 틈만 나면 나를 흔들어대는 세상. 나는 흔들린다. 세차게 흔들린다. 반항하듯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린다. 기포를 천장까지 끌어 모으며. 누군가 내 생의 한가운데 빨간 딱지를 붙인다. 나는 위험하다. 뗄 수 없는 빨간 딱지를 붙인 나는 위험하다.

엄마는 기포를 숨긴 채 살아가는 법을 가르친다.
난 언제든 분출하기 위한 꿈을 꾸며 산다. 미친 듯이 몸을 흔들어대며 내 몸의 탄산을 끌어 모은 채 자유롭게 뚜껑 밖으로 흘러가는 꿈을 꾼다. 누구의 유리잔에도 담겨지지 않는 꿈. 플로리다에서 건너온 한 흑인 남자와 함께 콜라의 비애에 대해 이야기하는 꿈.

콜라병 밖으로 주르륵 흘러나오는 슬픔.
아무도 모르는 뚜껑 속의 내가 세상 밖으로 새어나가고 있다. 위험한 콜라가 새어나가고 있다.
--- 「콜라병 속의 내가」
――――――――――――――――――

나는 지금 예민하다.

당신을 삭히기 위해
온몸의 거품을 끌어 올려야만 한다.

당신은 불안을 잊는다.
나는 홀로 감정을 곱씹는다.

당신에 대한 나의 감정
당신이 남긴 감정의 진실

언제쯤 불안을 이해할 수 있을까.

온몸의 거품을 끌어올린다.
나는 아직 예민하다.

아직 나는 당신을 처리 중이다
--- 「양변」
――――――――――――――――――

1년 4개월 동안의 동면을 견뎌낸 사직서. 사직서가 팩스 속에서 몸부림치며 깨어난다. 그리고 천천히 30초의 시간을 읽어 내려간다.

하얀 침대 시트 위에 누워 있던 환자. 꿈틀거렸던 환자의 손. 그 손의 치욕이 죽기보다 싫었던 30초. 끝내 편집하고 싶은 슬로우 비디오의 영상. 그 30초가 내게 먹구름을 데려왔다. 그 30초가 내게 잡풀 같은 괴로움을 주었다.

사직서가 사직서 속의 나를 고스란히 읽어준다. 비가 내리고 번개가 치던 날의 나를 읽어준다. 30초의 필름이 누군가의 입에서 내 실명과 함께 음성으로 재생된 5분. “이것은 분명한 프라이버시의 침해입니다.” 문제제기를 해야만 했던,

사직서가 운다. 울며 외친다. 수차례 항변했지만 끝내 묵살되고 말았던 말들. 나의 입장을 변호하는 사직서가 최후의 변론을 한다.

팩스가 사표를 받아먹고 비명을 지른다.
삐―이―익―
--- 「사직서가 운다」
――――――――――――――――――

어차피 이번 생은 틀려먹었다는 생각

칼날 같은 빗방울은 내리고
나의 뇌리를 뚫고 들어오는 빗방울의 생각들
나의 자궁까지 쳐들어오는
칼날 같은 생각들

알코올도 수면제도 없이
그 어떤 치명적인 무기도 없이

사랑할 수도 사랑받을 수도 없다는 생각
무엇으로 이 고통을 끝낼 수 있을까
오염된 빗줄기가 내리고
꽃도 나뭇잎도 빗방울에 젖는다

나는 하염없이 추락하는 빗방울
마침내 바닥까지 닿아 온몸이 골절되는 빗방울

나를 사랑하지 않는 모든 것들이
피와 식은땀으로 얼룩진 밤

오염된 빗방울의 일그러진 형태들
울부짖는 빗방울들

어차피 이번 생은 틀려먹었다는 생각
--- 「빗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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