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공장에서 현장실습을 하던 한 고등학생이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은 일이 있었다. 그의 죽음에 우리 사회가 모두 슬퍼했다. 또래 학생들은 피켓을 들고 항의 시위도 했다. 왜 그랬을까? 열여덟 번째 생일을 앞둔 그의 죽음이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나 한 개인의 죽음을 두고 사회나 정부를 향해 시위하는 게 적절한 행동일까?
사고 직후 해당 기업에서는 본인의 실수로 사고가 일어난 것이라고 했다. 사고의 원인이 당사자의 부주의 때문이라고 했다. 이 주장대로라면 학생들이 ‘우리도 죽을 수 있다’라며 시위를 한 건 적절하지 못한 행동이다. 개인이 조심해서 안전하게 일을 한다면 사고는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학생들은 항의 시위가 아니라 더 조심하자고 결의해야 했다. 그러나 기업의 주장대로 사고 원인을 오롯이 피해자 개인에게 돌리는 것이 올바를까?
위험한 기계가 작동하는 작업장에서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여 조심해야겠지만, 개인의 조심성만으로 사고를 막을 수는 없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안전장치를 하고 안전관리자를 배치하는 등 충분히 방비해야 한다. 하지만 사고가 난 기업은 실습 교육을 받는 학생을 혼자 일하게 했다. 일을 지도하거나 안전을 관리하는 사람도 없었다. 실습 시간을 넘기는 장시간 노동까지 시켰다. 이런 조건에서 개인의 조심성이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까? 개인이 조심했다면 정말 사고는 안 일어났을까?
피해자가 조심하지 않았다 해도 조심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면, 조심하더라도 사고가 날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면 사고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 그런데도 기업은 사고의 원인을 피해자의 잘못으로 돌렸다. 사고 원인이 피해자 개인에게 있을수록 기업의 책임은 그만큼 줄어 사회적 비난이나 배상의 부담을 덜어낼 수 있다. 그래서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상황에서 나오는 주장들에는 더욱 비판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손실을 피하거나 이익을 얻으려고 인과관계를 왜곡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과학적인 분석 작업이면서 때로는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원인이 무엇이냐, 누구에게 있느냐에 따라 그에 따른 책임의 소재나 크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과관계를 규명하는 과정에는 논란과 갈등이 많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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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직접 원인은 비교적 겉으로 잘 드러나는 편이지만, 간접 원인은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직접 원인만 보고 인과 판단을 하기가 쉽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직접 원인에만 매달리게 되면 올바른 인과추론이라 할 수 없다. 인과 판단이 잘못되면 원인 규명이 정확하지 않고,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 같은 일이 반복될 수도 있다.
---「2장_분석이 쓰면 인과는 달다」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 가지 요소 중 에토스와 파토스가 로고스보다 큰 역할을 한다고 보았으나, 우리가 주목할 건 로고스다. 이 책은 비판적 사고를 강조하는 책이니까. 로고스를 중심으로 보았을 때 설득력이 있는 주장은 논증 구조를 잘 갖추고 있어야 한다. 논증이란 주장의 옳고 그름을 입증하는 것으써, 논증 구조가 갖춰진다는 건 주장이 적절하고 타당한 논거로 뒷받침되고 있음을 말한다. 그럴 때 우리는 그 주장을 설득력 있다고 평가한다. 주장과 논거가 잘 연결되어야 설득력이 높아지는 것이다. 어떤 주장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면 그 논거가 무엇인지를 보아야 하며, 주장의 설득력을 높이려면 그에 합당한 논거를 제시해야 한다.
갑 코로나19는 타락한 백성과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기도하고 회개해야 극복할 수 있다.
을 코로나19는 비말로 전파되는 호흡기 질환으로 마스크를 쓰면 감염 위험은 전혀 없다.
전염병이 기도로 극복될 수 있다는 주장과 마스크를 쓰면 된다는 주장 모두 나름의 논거를 갖고 있다. 어떤 주장이 설득력 있다고 생각하는가? 전염병의 원인을 신이나 마귀로 설명하는 건 종교적 비유일 수는 있어도 병에 대한 대처 방법을 제시하는 주장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논증 구조를 갖추고 있다고 해서 모든 주장이 설득력을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논거에 오류가 없어야 하고 주장과의 연결에 논리적으로 문제가 없어야 한다. 제시된 논거가 사실인지 또 하나의 의견인지 구분은 당연하고, 그에 따라 참과 거짓이나 타당성 평가도 있어야 한다. 객관적 사실이 아니거나 타당성이 인정되지 않는 의견을 논거로 내세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마스크를 쓰면 병을 예방할 수 있다는 을의 말은 과학적으로 파악된 전염 경로를 근거로 하기에 갑의 주장보다 설득력이 있다. 그렇다고 을의 주장이 전적으로 옳다고 할 수 있을까? 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가 손을 통해서도 감염된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마스크 쓰기만을 강조하고 있어 을의 주장에도 한계가 있다. 논증이란 어떤 사안을 주장의 논거로 제시해서 밝히는 표현 방식일 뿐이다. 이것이 잘 이루어지면 설득력이 있는 것이지 그 자체로 올바름이 확인되는 건 아니다. 논증 구조를 갖춘 주장이라고 해도 얼마든지 잘못된 결론을 담을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주장을 접하게 되면 논증 구조를 갖췄는지를 볼 뿐만 아니라, 그 논증 구조에 대해서도 비판적 사고는 필요하다. 또한 논거를 볼 때는 근거인지 이유인지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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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증은 주장의 옳고 그름을 입증하는 표현 방식으로 이 역시 하나의 의견이다. 설득력이 있는 논증이라도 그 자체로 진리(사실, 참)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접하는 주장들은 대개 나름의 논증 구조를 갖고 있고 설득력을 경쟁한다. 설득력 높은 논증을 고민해야겠지만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고 해서 맹신해서도 안 된다.
---「3장_논증은 논증이 필요하다」중에서
특정한 관점, 가치를 절대시함으로써 그 외 것을 배척, 폄하하는 편견 역시 무주의 맹시에 빠진 거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철학자 베이컨은 인간의 정신을 사로잡는 편견을 우상(偶像, idol)이라 불렀다. 숭배로 보일 만큼 사람들이 사로잡히는 생각이라는 뜻이지만, ‘아이돌’을 좋아하듯 널리 퍼져 있는 태도라는 의미도 있지 않을까 한다. 베이컨은 우상을 네 가지로 제시했다.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극장의 우상 그리고 시장의 우상. 종족의 우상은 모든 것을 인간이라는 ‘종족’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나 감정, 이해관계에 따라 세계를 이해하는 태도다. 자연을 정복, 개발의 대상으로 보는 게 대표적 사
례다. 동굴의 우상은 개인이 가진 문화, 교육, 환경 등에서 오는 편견이다. 자문화 중심주의나 인종 혐오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극장의 우상은 전통과 관습, 권위 있는 학설이나 사람의 말을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베이컨은 이를 정해진 각본에 따라 연극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시장의 우상은 인간 사이의 교류와 접촉, 의사소통에서 비롯되는 편견이다. 인간 사이의 교류와 소통은 언어에 의존하는데, 이것이 인간의 지성을 우상에 빠트릴 수 있다. 귀신의 존재 증거를 귀신이라는 말에서 찾는 것처럼 허황되거나 잘못된 개념의 사용도 그런 사례다.
우상(편견)은 인간이 감정적이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성적인 사고에서 생긴다고 보아야 한다. 베이컨의 우상론은 인간의 이성이 합리적이지만은 않다는 걸 보여 준다. 이성으로 얻은 지식을 과도하게 신뢰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상에 빠지는 것에는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서 세상을 보고 살아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다. 인간이기에 갖게 되는 인식 특성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방치해야 할까? 아니다. 우리가 그런 우상에 빠질 수 있음을 인식하고, 그런 편견으로 우리의 사고가 오염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앞 장에서 살펴봤듯이 논증도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논증 구조를 갖춘, 얼핏 설득력이 높아 보이는 주장도 잘못된 논증인 경우가 많다.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주장에는 잘못된 논증임에도 옳다고 착각하는 말이 많다. 논리학에서는 이를 오류라고 한다. 잘못된 논증임을 누구나 쉽게 아는 논증은 오류일지언정 그다지 해롭지는 않다. 논리적으로 틀렸지만, 심리적으로는 꽤 설득력이 있는 논증이 위험하다. 겉으로 보이는 설득력에 현혹돼 ‘고릴라’를 볼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4장_우상과 오류」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