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파괴되는 것 자체가 생산물이자 상품으로 바뀌고, 부의 집적은 사망자의 숫자를 기입하는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죽음이야말로 가장 수익성 높은 사업으로 등극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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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어 자본주의가 진행되는 과정은 공식 경제의 담론에서 비가시화되어 있고 자본주의 사상 체계에서 도외시된다. 주목할 만한 해석적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중요하거나 복잡한 문제로 간주되지도 않으며, 암시장의 일부로 한정하거나 자본에 대한 영향만을 따진다. 그러나 범죄 총생산이 적어도 전 세계 무역의 15퍼센트를 차지하리라 추정되는 상황에서 고어 자본주의가 세계 경제에 끼치는 영향은 자명하다.
---pp.20~21
고어 자본주의가 출현하고 수용되고 정상화된 이후로, 폭력 행위를 설명하는 데 있어 합법성과 불법성의 범주가 여전히 유효할 수 있을까? 무엇이 폭력을 합법적인 것으로 바꾸는가? 폭력을 행사하는 우리에게 청구될 금액은? 폭력의 독점권은 더 이상 국민 국가의 배타적 소유물이 아니다. 폭력의 독점권은 경매에 붙여졌고 가장 높은 입찰가는 조직범죄가 부르고 있다.
---p.48
이러한 패러다임 변화의 대표적 예로 2009년 1월 24일 티후아나 국경에서 붙잡힌 청부 살인 업자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이 청부업자는 티후아나 카르텔 두목의 채무자와 반대자들을 산에 용해시키는 일을 하다가 체포된 후 첫 공판에서, 자신이 시신 300구를 용해시켰고 그게 자기 일이자 평범한 직업이었다고 진술했다. 주당 600달러를 받던 일이었다. 그런데 노동의 불안정화는 제3세계 국가에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권력이 모이는 중심부에도 상수처럼 존재하며 막대한 부와 공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p.51
고어 자본주의, 노골적이고 눈에 띄는 폭력 행위로 특징지어지는 이 시스템의 이름하에 “매일 5만 명씩 당연한 듯 죽어 나가며, 거대 다국적 제약 회사가 세계적 전염병 대처에 기여하지 않아도 무방하며, 이러한 끔찍한 사회적 불평등이 허락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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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도덕적으로 확고한 관점에서 엔드리아고 주체의 행동을 평가하는 것은 그들을 재단하고 단죄하는 담론을 만들어 내는 결과를 낳을 것이며, 고어-되기 ---p.devenir gore)에 대한 대안을 세우는 것을 방해할 뿐이다. 순전히 도덕적인 담론적 입장에서 그들을 평가하는 것은 그들의 행동을 단순화시키고 낡은 척도로 구분해 꼬리표를 붙이도록 만든다. 구체적인 일상의 현실은 윤리적 명명법 안에 가둘 수 없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변화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빈곤의 사회학 혹은 게토의 형이상학”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엔드리아고 주체성을 해석하는 담론을 만들려는 타자화의 유혹을 경계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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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살인은 하나의 거래로, 극단적인 폭력은 정당성을 얻기 위한 도구로, 고문은 고수익을 보장하며 권력을 전시하고 행사하는 수단으로 이해된다. 한때 글로벌 지하 세계로 이해되던 것이 빠르게 약진하여 이제는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고어 자본주의는 그간 우리의 삶에 침투해 왔으며, 우리가 단순한 소비자/구경꾼 역할에 머문 상태에서는 그 사실로부터 우리를 분리할 수 없다. 우리에게 일상화된 수많은 현상은 조직범죄와 유착되어 있다. 고어는 더 이상 영화 장르로 축소될 수 없으며, 찌라시나 선정적인 언론에만 등장하는 이름도 아니다. 고어는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p.93
엔드리아고 주체는 새로운 자본주의의 행위 축으로서,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으로 녹아 사라진다는 근대성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슬로건을 박살낸다. 이제 견고하고 소비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피 위에 세워진다.
---p.95
엔드리아고는 문학 속 인물이자 괴물로 인간, 히드라, 용 사이의 잡종이다. 거대한 신장, 민첩한 움직임, 잔혹한 성격이 특징인 엔드리아고는, 갈리아의 아마디스가 맞서 싸워야만 하는 적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엔드리아고는 어떤 적수라도 두려워하고도 남을 만큼 공격과 방어에 천부적 자질을 지녔다고 묘사된다. 엔드리아고의 잔혹성이 어찌나 유명한지, 그가 살고 있는 섬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곳, 일종의 지상 지옥으로 소개된다. 오직 영웅심이 광기의 경계에 닿을 정도로 넘쳐나는 기사만이 들어간다는 이 섬에 대한 설명은 현대의 국경 지대와 비슷해 보인다.
---pp.96~97
우리는 티후아나에 대한 접근하려면 이 도시에 대한 세 가지 가장 흔한 클리셰와 대화하는 동시에 거기에 도전해야 한다고 단언한다. 포스트모더니티의 실험실, 티후아나. 지나가는 도시, 티후아나. 악덕 도시, 티후아나. 물론 이러한 특징이 티후아나의 꽤 중요한 부분을 구성하며 존속한다는 사실은 인식해야 하기 때문에, 이를 회피해 버려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 클리셰만으로는 이토록 모순적인 국경을 형성하고 있는 현실을 설명할 수 없다. 티후아나의 중심핵인 폭력의 경제를 고려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p.135
고어적 관행이 두려운 이유는, 점점 더 가까이에 다가오지만 우리는 그것을 직면은커녕 생각하도록 훈련받은 적도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느 누구도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자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저 자신이 사는 방식은 다르니까 어떤 위험으로부터도 안전하다고 확신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p.167
여성들, 그리고 이성애 가부장제 범주에 반하거나 하위 주체로 이해되는 모든 주체들은 역사를 통틀어 고어 안에서 살아왔다.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극단적 폭력, 그리고 근래 미디어를 통한 매개적 폭력은 우리 일상, 우리 교육의 일부였다. 마치 “악질적이고 야만적인 러시안 룰렛에 우리를 끼워 넣는 낙인”과 같은 역특권처럼, 취약성과 폭력으로 점철된 조건이야말로 여성의 명백한 운명(destino manifiesto)에 내재된 것이라고 전제하는 담론이 구축될 때, 폭력이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고어 자본주의가 행사하는 잔혹한 폭력에 대한 응답을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다.
---p.183
남성성을 해체하고 복수의 남성성을 생성하는 움직임은 젠더 관점과 트랜스페미니즘과 함께 갈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트랜스페미니즘은 여성의 사회적 운동뿐 아니라, 디스토피아적이지 않은 새로운 정체성(여성과 남성 모두를 포함한)을 만들어 내고 이해하기 위한 인식론적 범주를 의미한다. 새로운 주체적 동맹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젠더에 대한 이분법적이고 위계적인 전제에 매달리는 것을 지양할 필요가 있다.
---p.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