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시작은 미약했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는 말이 있다.『장자』에도 비슷한 문장이 존재한다. 그러나 말이 쉽지, 현실에서는 이런 사례를 잘 볼 수 없다. 물론 역사적으로 살펴봤을 때, 그러한 경우가 간혹 존재하기는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중국사에서는 청나라의 건국이다. 개국 군주 누르하치가 조상이 남겨놓은 갑옷 13벌을 토대로 세력을 키워 명나라를 멸망시킨 뒤, 인류 역사상 최대 제국을 건설하는 기적을 이룩하는 이야기다. 청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된 왕조 중 하나인 만큼 창대한 정도에 그치지 않는, 실로 엄청난 족적이다.
이에 필적하는 ‘창대한 사건’이 중국 현대사에도 있었으니, 바로 중국 집권당인 공산당의 창당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 기적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공산당이 정식 창당된 1921년 전후는, 청나라가 멸망하고 각 지역의 군벌들이 날뛰던 시절이었다. 공산당은 그 이름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베이징대학 교수 리다자오(李大釗)와 천두슈(陳獨秀) 등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을 연구하는 비밀 모임만 존재할 뿐이었다. 정치적 세력은커녕 작은 학회 정도에 불과한 모임이었다.
일부 지식인들은 그 단체를 맬더스의 인구론을 연구하는 학회로 알고 있었다니, 설명할 필요도 없는 수준이었다. 그마저도 전국을 통틀어 고작 50명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그 수가 적었다. 당시 중국 인구가 3억 명 정도였으니 미미하다는 표현조차 과한 숫자다.
그러나 새로운 이념에 대한 이들의 열정만큼은 대륙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리하여 전국의 대표 13명을 모아 1921년 7월 상하이(上海)에서 정식으로 중국공산당을 결성했다. 베이징 대표 류런징(劉仁靜), 장궈타오(張國燾), 상하이 대표 리한쥔(李漢俊), 리다(李達), 산둥(山東)성 대표 왕진메이(王盡美), 덩언밍(鄧恩銘), 후베이(湖北)성 대표 둥비우(董必武), 천탄추(陳潭후난(湖南)성 대표 마오쩌둥(毛澤東), 리수헝(李淑衡), 광둥(廣東)성 대표 천궁보(陳公博), 바오후이썽(包惠僧), 재일본 대표 저우포하이(周佛海) 등이었다. 중국 공산당을 대표하는 거물이 된 저우언라이(周恩來)와 류사오치(劉少奇) 등이 이들과 합류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이들은 대부분 혈기왕성한 20, 30대의 학생들과 청년들이었다. 지금으로 치자면 소수의 학생 운동권 대표자들이 모인 셈이었다. 당연히 별로 주목하는 이들도 없었다. 당시 공산당을 최대의 적으로 삼았던 상하이 조계 경찰조차 이들의 행동을 간과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들이 훗날 중국 공산당의 기초를 다진 역사적인 인물로 기록되는데, 특히 마오쩌둥과 그의 동료들이 그 주인공이다.(반면 천궁보, 장궈타오,저우포하이 같은 인물들은 일본에 협력한 민족반역자가 되거나 국민당으로 전향하는 등 변절을 거듭했다.)
중국 공산당은 이후에도 큰 발전을 이룩하지는 못했다. 세력 면에서 압도적이었던 장제스의 국민당에 늘 눌려 지내야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2만5000리 대장정에 나섰던 1934년 이전에는 국민당의 토벌 작전으로 궤멸 직전의 위기에 몰린 적도 있었다. 1차 국공합작이 붕괴되는 계기가 된 1927년의 4.12 백색 테러 당시, 수많은 공산당의 맹장들이 목숨을 잃게 된 것이다.
전화위복이라 했던가. 공산당은 대장정을 통해 위기에서 벗어난 뒤, 1936년 제2차 국공합작을 통해 부활의 전기를 맞이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1945년까지는 국민당과 합작하여 항일 전쟁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항일 전쟁 승리 후, 다시 국민당과 국공내전을 시작했는데, 이때 세력 면에서 압도적이었던 국민당을 외딴 섬 대만으로 패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누르하치가 13벌의 갑옷으로 청나라를 세웠듯,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13명의 공산당 대표들이 새로운 중국을 건국한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2021년 7울 초 창당 100주년을 맞이한다. 13명으로 시작한 단체의 당원 수는 현재 1억 명에 달한다. 공산당의 이러한 번영과 오랜 집권의 역사는 인류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다.
---「드라마틱한 중국 현대사 - 홍광훈·서울여자대학교 중문학과 교수」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