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열차는 탄광 지하 수백 킬로미터를 돌아 나왔다. 시아버지가 손수 지으신 고택에는 서까래가 나팔을 불고 뒤란에는 파란 이끼가 영토를 넓혔다. 사랑채 방문을 여니 어두침침한 방에 흑백 사진이 벽에 걸려 있다. 추억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장독대와 텃밭에는 봄볕을 받아 싱싱한 채소들이 파릇파릇 올라왔다. 마당 한쪽 우물을 덮은 뚜껑 위에는 두레박이 주인처럼 덩그러니 입을 벌리고 있다. 목을 쭉 빼고 우물 속을 들여다보니 파란 하늘이 통째로 들어앉았다. 시아버지의 휘하에 다섯 동서가 손톱이 빠지도록 밭에 돌을 골라낸 아린 기억들이 찰랑찰랑 속삭였다.
신앙의 거미열차는 객실을 수없이 늘리며 먼 길을 달려왔다. 주님의 섭리 안에 증조할아버지부터, 시아버지와 칠 남매의 자식들, 아들 손자들까지 다섯 세대를 이어왔다. 김 도마 시아버지께서 신앙의 뿌리를 튼튼하게 심어 주지 않았다면, 내게 오늘 같은 영광스러운 일이 어찌 있었을까? 대대로 물려주신 녹이 슨 구리 십자가는 하느님이 동행을 해 주셨다는 증거가 되었다. 바통을 물려받은 자식들도 미래를 향해 칙칙폭폭 힘차게 달릴 것이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만세 대대로 찬미와 영광 올립니다. 아멘.
--- 「신앙의 거미열차」 중에서
“새아가. 들에 가서 나락 논을 한 바퀴 둘러보고 오너라.”
그 말씀에 고마워서 방으로 내달렸다. 연분홍 블라우스에 빨간 미니스커트를 꺼내 입었다. 황새 같은 다리를 휙, 자전거에 올리고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동네 사람들이 모인 거리를 지나자 한마디씩 날렸다. “저기에 호랑이 할머니네 넷째 며느리다.” 공손하게 고개를 한번 꾸뻑 숙였다. 황금들판이 출렁거리고 누렇게 익은 나락들이 허리를 굽혀 나를 향해 절을 했다. 논둑에 세워놓은 허수아비 팔에 매어둔 줄을 잡고 ‘훠이훠이’ 하면 새들이 ‘푸득푸득’ 날아갔다. 거북 등짝처럼 쩍쩍 갈라진 논에 물고를 돌렸다. 물이 콸콸 들어가고 개구리들은 개골개골 합창할 때 나는 콧노래를 불렀다. 삼베 주머니에 메뚜기를 아기 베개만큼 잡았다. 진간장에 짭조름하게 졸여 먹을 생각에 군침이 돌았다.
--- 「수레바퀴 밑에서」 중에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천기누설을 하지 않았다. 그런 깊은 속정을 뒤늦게 알게 되어 가슴을 울렸다. 명절 때만 찾아뵙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울로 올라왔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시어머니의 며느리에 대한 측은지심이었을까. 그때 낳은 아들이 40세가 넘도록 기다렸다. 이제는 그 비밀의 문을 열어야 할 때이다. 시어머님의 제사 때 내려갔다. 형제들은 제사상에 절을 두 번씩 하고 바쁘다며 다 돌아가고 형님과 단둘이 남았다.
춘삼월 꽃구경을 나섰다. 산수유와 매화꽃이 싱글벙글 웃었다. 그 옛날처럼 갈비가 지글지글 구워지는 동안 막걸리를 한 잔, 두 잔, 석 잔을 들이부었다. 나는 형님에게 천기누설을 하였다.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형님의 얼굴 사이사이로 사계절이 휙휙 지나갔다. 눈가에 이슬방울이 맺혔다가 주름진 골짜기로 흐르고 흘렀다. 한참 후 형님의 환한 얼굴에 홍매화가 활짝 피었다.
“이 사람아, 순진하기는. 시어머님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해주었어. 자네가 동생 같아서 산후바라지를 해준 걸세. 사랑은 내리사랑이라잖아.” “어머,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휴.”
골목길에서 손을 마주 잡고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큰 소리로 불렀다.
“어머님, 어머님, 어머님, 고맙습니다.” 그 메아리는 맞은편 앞산을 휘돌아 세상을 향해 멀리멀리 날아갔다.
--- 「천기누설」 중에서
병실 문이 열렸다. 수간호사가 들어왔다. 머리맡에는 그분께서 물과 거름을 주고 가꾸어 놓은 포도송이들이 둘러앉았다. 평생 무겁게 내리누르던 멍에를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깡마른 겨울나무처럼 몸이 부르르 떨렸다. 백의의 천사가 두 손으로 호스 줄을 잡고 산소 호흡기를 떼어 내었다. 온 가족이 임종 기도와 포도나무 성가를 부르며 그분을 보내드렸다. 이제 우리가 포도밭을 물려받았다. 그분이 살아 냈던 것처럼 땀 흘려 가꾼다면 다음 세대에도 보랏빛 포도가 주렁주렁 열리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작은 열매도 맺을 수 없듯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그러하리라….” 〈요한 15, 1~10〉.
포도밭은 그분이 삶의 애환을 달래던 곳이었다. 흙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 이해받지 못하는 시간을 마주하고 시름시름하였다. 척박한 땅에 던져진 동생들이 도회지에서 뿌리를 잘 내리도록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육신은 힘들었는지 몰라도 마음은 얼마나 뿌듯했을까. 그분은 칠십에 돌아가셨다.
지금 내 나이가 칠십이다. 나는 포도밭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밭고랑 사이사이마다 그분이 견뎌냈을 시간들이 발아래 펼쳐졌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이해받지 못할지라도 나를 비워내는 소중한 공간이다.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어 줄기를 뻗어 나갈 수 있는 그들의 포도밭이 되어 주리라. 저기 높은 곳에서 평온하게 지낼 그분을 불러본다.
“시숙님, 이제 제가 하겠습니다.”
--- 「그분의 포도밭」 중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긍지와 보람을 보여주려는 의도와는 달리 어려운 환경을 물리치며 지나온 삶의 여정과 어려운 고비를 넘어 가는 길을 보여주고 있다. 행복·행운으로 이어지는 삶의 모습보다도 자신에게 주어진 어려운 삶을 오로지 근면과 성실, 신앙의 힘으로 극복해 온 모습을 보이고 있어서 믿음을 갖게 한다. 수없이 넘어지고 일어서는 오뚝이처럼 굳세게 살아온 인생의 길과 마음의 성숙이 독자들에게 든든함을 보여주고 있다.
수필쓰기는 자신의 삶과 인생에 활력을 불어넣고, 삶의 의미와 깨달음을 스스로 꽃피워 놓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희망과 성실한 자세로 자신의 삶을 꽃피워 온 작가에게 박수를 보낸다.
--- 「서평」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