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세계관은 언제나 정신의학적 행동의 대상에 지나지 않았고, 사람들은 심리주의psychologism의 오류에 빠져서 심지어 ‘세계관의 심리학’에 관해 말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때 열등감에서 나온 염세적 이고 숙명론적 세계상의 기원이 부적절한 비판을 의미한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이는 마치 인생의 의미를 의심하고 자포자기한 사람에게 비소 요법이 신체 상태를 낫게 해준다고 충고하는 것이나 똑같다. 중요한 것은 환자의 인생관에 대한 내재된 비판이고, 이는 우리가 원칙적으로 순전히 세계관적 토대 위에서 논의할 자세를 갖추는 일이 전제되어야 했다. 세계관에 대한 심리치료란 존재하지 않고, 또 그런 선험적인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심리치료로서의 세계관은 가능하고, 우리가 보여 준 것처럼 가끔 필요할 때도 있다. 철학 내에서 논리주의logicism로 심리주의를 극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심리 치료에서 지금까지의 심리적 편차는 ‘로고테라피’로, 다시 말해 세계관적 논쟁을 심리치료법 전체에 포함시키는 것으로 극복할 수 있다. 비록 조건적, 제한적, 중립적 형태, 즉 실존 분석의 형태일지라도 말이 다. 실존 분석은 인간 실존의 본질인 인간의 책임성이라는 부정할 수없는 근원적 사실에서부터 출발하고, 환자 쪽에서 이러한 사실을 철저히 받아들이는 것 자체를 목표로 삼는다. 이 점이 환자의 정신적 의지 처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 준다.
---「심리치료의 정신적 문제점에 대해」중에서
심리치료가 환자에게 신경증에 대항해 무기를 통제하게 하고 칼을 다루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면, 약은 마치 전투에서 환자의 힘을 증대시키는 도핑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벤제드린이 가져다준 활력은 계속되는 훈련으로 틀림없이 발전할 것이고, 이제부터 환자는 활기를 가져오는 것은 물론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실제로 이는 몇 주간 계속 이어진 치료에서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그 기간 동안 환자는 더 자주 ‘유혹에(예를 들어 손 씻기 강박 같은) 저항하기’ 위해 벤제드린을 매일 한 알에서 두 알씩 복용했다. 심지어 그녀는 강박적 상상(예컨대 손이 더러워졌다는)이 ‘더 희미해졌다!’고 말했다. 결국 벤제드린을 더 이상 복용하지 않을 때도 제한된 범위 내에서의 성공은 유지되었다. 환자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강박신경증 충동에서 완전히 거리를 두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저는 여기 있고 강박적 상상은 저기 있어요. 그것은 계속 제게 말을 걸어요. 하지만 받아들여선 안돼요. 강박적 상상 자체는 씻을 수 없거든요. 전 그래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뿐이에요.” 이 단계에서 치료는 외적인 이유로 중단되었다.
---「신경증 환자 심리치료에서의 약물 지원에 대해」중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했을까? 강제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을 내적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온갖 노력은 그들이 미래의 목표에 방향을 맞추도록 하는 것을 전제로 했다. 하지만 더 이상 미래를 믿지 못한 사람은 수용소에서 길을 잃었다. 그는 미래와 함께 정신적 버팀목을 잃었고, 내적으로 자포자기했으며,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쇠약해졌다. 더군다나 이러한 일은 대부분 너무나 급작스럽게 일어났는데, 경험이 많은 수감자가 보기에는 익숙한 형태의 위기였다.
모든 심리치료 노력이 수감자들을 상대로 간직했던 좌우명은 수용소에서의 삶, 살아남기, 생존을 향한 의지였다. 그렇지만 삶의 용기나 삶의 권태는 과연 삶의 ‘의미’에 대한 믿음이 있는가, 오로지 이것에만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니체는 “왜 사는지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도 견디어 낸다.”라고 말했는데, 강제수용소에서 이 말은 모든 심리치료 작업을 위한 좌우명으로 삼아도 좋았을 것이다. ‘왜’, 이것은 삶의 목적이고, ‘어떤 상황’은 수용소 생활을 힘들게 만드는 삶의 조건이었다. 그곳 생활은 오로지 이 왜와 관련해서만 견딜 수 있었다.
때때로 기회가 주어졌을 때마다 수감자들에게 삶의 ‘왜’를, 인생의 목표를 깨닫게 해 주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현존의 끔찍한 ‘어떤 상황’ 에도 내적으로 성장하고, 수용소 생활의 공포를 이겨 낼 수 있게 도와야 했다.
---「강제수용소 심리학과 정신의학」중에서
그렇지만 오늘날 인간에게 모든 의미 지향은 더 무거워졌다. 무엇을 먹고살든 넉넉해지긴 했지만, 정작 자신이 살아가는 무엇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 한마디로 인간은 무의미감으로 괴로워하고 있다.
복지국가와 복지사회는 실제로 인간의 모든 욕구를 만족시킨다. 물론 소비사회 형태 안에서 개인의 욕구가 만들어지는 것은 처음이다. 단하나의 욕구만 홀대 받았는데, 그건 바로 인간의 감각이다. 지배적인 사회적 조건 아래서 그것은 좌절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의미에의 의지’로 내가 동기 이론적 개념으로 표현한 것이다. 인간은 의미를 발견할 때─만약 필요하다면─포기하고, 고통을 감수하고, 희생하고, 목숨을 바칠 각오가 돼 있다. 하지만 반대로 인생의 의미에 대해 알지 못할 때,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지낸다 할지라도 삶에 경고 신호를 보내고, 경우에 따라서는 삶을 내팽개칠 수도 있다. 물질적 풍요와 과잉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오늘날 우리가 대면하는 자살률의 증가는 물질적인 풍요에도 실존적 좌절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
---「심리화인가 의학의 인간화인가」중에서
로고테라피(의미치료)와 실존 분석은 각각 같은 이론의 한 면이다.
의미치료가 심리치료 방법이라면, 실존 분석은 인간학적 연구 방향을 말한다. 연구 방향으로서 실존 분석은 두 가지 차원에서 열려 있는데, 그것은 다른 학문과 협력하고 스스로 진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
먼저 ‘로고테라피’에 대해 말하면, 이 단어가 치료법 범위 내에서 ‘환자에게 논리로 다가간다’는 데서 유래한 말은 아니다. 이는 의미치료를 설득법과 혼동한 것일 수 있다. 실제로 로고테라피는 어떤 의미 에서, 즉 적어도 그 치료법 안에서 ‘역설적 의도’라고 불리는 것의 관점에서 볼 때 설득의 정반대를 나타낸다.
실존 분석에 따르면 무의식적 충동성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무의식적 영성도 존재한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는 충동적으로 무의식적인 것뿐 아니라 영적으로 무의식적인 것도 알고 있고, 또 인정한다. 실존 분석의 치료 형태, 즉 로고테라피가 추구하는 방향이자 출처를 이루는 로고스는 무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로고스는 첫째로 이성ratio, 둘째로 오성intellectus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말로 말해서 우리가 의미하는 정신적인 것은 한편으로는 단지 지적인 것, 다른 한편으로는 단지 이성적인 것과 동일시되어선 안 된다.
‘실존 분석’과 관련해, 여기서 실존이라 함은 존재 형태, 무엇보다도 인간 존재의 본질을 뜻한다. 이러한 현존 Dasein 의 특별한 형태에 동시대 철학은 실존이라는 이름을 달아 주었는데, 실존 분석 혹은 의미치료에서 우리는 내용을 위해 이 표현을 차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존 분석은 원래 실존의 분석*이 아니다. 왜냐 하면 실존의 종합synthesis이 존재하지 않듯 실존의 분석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실존 분석은 오히려 실존의 설명이다. 우리가 간과하면 안 되는 것은 실존, 즉 인격체는 설명한다는 것이다. 그는 살아가면서 스스로 설명하고, 발전하고, 자신을 펼친다. 마치 활짝 펼친 양탄자가 그만의 독특한 문양을 드러내듯이 우리는 살아가면서, 성장하면서 인간이라는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다.
---「제2부 실존 분석과 로고테라피 개요」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