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에서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이 책은 〈블레이드 러너〉 신화를 과감히 해체하고 시대에 걸맞은 객관적인 평가를 하겠다는 의도로 묶이지 않았다. 그렇게 모질게 굴기엔 우리는 이 영화를 몹시 사랑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블레이드 러너〉를 더 오랫동안 사랑할 수 있는 생각과 상상의 방법을 제안하는 책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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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시각적 충격을 강조하지만, 〈블레이드 러너〉의 새로움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보다 기존 요소들을 흥미롭게 뒤섞고 변용하여 이질적인 것들이 자연스럽게 하나의 광경을 형성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 약간 과장해서 말하자면, 화면 속에 보이는 모든 것에 레퍼런스가 있다. 모든 것이 다른 무언가의 이미지만을 가져온 것인데, 그런 이미지들이 병치되고 누적되어 화면을 가득 채우면서 발생하는 특유의 밀도가 있다.
--- p.34
티모시 모턴은 그 규모가 거대해서 전통적인 시공간의 차원 속에서는 문제를 해결하거나 완벽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을 가리켜 거대객체, 또는 하이퍼오브젝트(hyperobject)라는 용어를 제안한 바 있다. 너무나 작아서 너무나 큰 초미세먼지는 대표적인 하이퍼오브젝트로, 이 문제를 대하는 우리는 이중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 p.57
권력은 순수가 무엇인지 정의하고 그에 따라 질서를 만들고자 한다. 이때 오염은 그 질서에 알맞은 “장소를 벗어난 것”으로, 질서를 어지럽히고 권력을 위협하는 것이다. (...) 오염이 질서에 위협이 되는 것처럼, 거부당한 이들은 도시 질서에 위협이 된다. 쓰레기장은 도시의 쓰레기를 온전히 받아내고, 그 대가로 도시는 쓰레기장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유예한다. 이로써 쓰레기는 이 두 곳의 긴장된 공존을 매개한다.
--- p.66
초기 대본과의 개연성을 따져본다면, 타이렐의 피조물이 월리스 코퍼레이션을 설립해 레플리컨트 개발을 이어가고 있다고 보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이건 마치 삼성전자에서 생산된 최우수 반도체가 자사의 최고 경영자가 된 것이나 다름없다.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월리스의 경제 생태계가 지닌 중요한 특징이 여기에 있다. 생산물이 소비자가 될 수 있고, 생산물이 생산자이자 경영자도 될 수 있다.
--- p.85
침묵은 비단 레이첼뿐만 아니라 〈2049〉에 대거 등장하게 된 여러 여성 캐릭터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인공지능 홀로그램 캐릭터 조이는 과연 K를 사랑했을까? K의 상관인 조시와 월리스의 비서 러브는 충분히 K를 제거할 수 있었음에도 왜 그를 마지막까지 살려두었을까? 영화는 여성 캐릭터들에 별다른 서사를 할애하지 않는다.
--- p.104
디스토피아는 유토피아라는 개념이 있을 때 비로소 의미가 뚜렷해진다. 디스토피아 서사의 주요한 맥락은 유토피아가 좌절되고 그것을 위해 걸었던 희망이 무너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디스토피아는 단순히 절망적이고 부정적인 것들이라는 모호하고 관념적인 개념들을 포괄하는 지옥도와 같은 세계관으로만 단순하게 정의할 수 없다. 희망이 꺾이고 그것들로부터 잃어버린 것들이 흩어져 있는 황폐한 세상이라는 전제가 가장 근본에 있는 것이다.
--- p.135
〈블레이드 러너〉의 유산은 영감(inspiration)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면서 여러 영화와 애니메이션 속으로 퍼져나갔다. 미래가 되어도 사라지기는커녕 고스란히 남아 있는 도시의 척박함, 아예 보이지 않거나 뿌연 스모그로 자취를 감춘 하늘, 도무지 끝이 안 날 것처럼 보이는 뒷골목, 고독을 벗 삼으며 사건을 해결하지만 미래가 크게 개선될 여지가 안 보이는 주인공들. 이러한 요소들이 특히 SF에서 등장할 경우 〈블레이드 러너〉라는 이름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 p.176
그것은 〈블레이드 러너〉와 〈블레이드 러너 2049〉의 마지막 장면에서 로이와 조가 따로 또 같이 강조했던 ‘빗속의 눈물’과 ‘손바닥 위의 눈송이’의 덧없는 물질성을 환기해주기도 한다. 비에 휩쓸려 사라질 눈물과 순식간에 녹아버릴 눈송이란 결국 사그라진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덧없지만, 그 존재의 ‘기원’과 무관하게 이들은 결코 부인할 수도, 기각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오롯이 지속되는 존재들의 ‘표면적 역사성’을 긍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 p.203
인스타그램의 사이버펑크 스타일 사진은 〈블레이드 러너〉의 미래가 지금 이 도시의 한구석에 존재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연약한 위로를 전달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합의된 거짓말에 가깝다. 세기말 일본의 어떤 이들이 일찍 도래한 미래에 대해 느끼던 기쁨을 이 사진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디지털 필터로 인해 붉고 푸르게 물들었던 도시의 풍경은 금방 다시 일상적인 모습으로 돌아가고, 딱히 변화 없는 체제의 삶은 지속될 것이다. 이것은 어느 순간 미래가 도래하였다고 해도, 그것이 현실이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는 일종의 무력함을 누설한다.
--- p.223
물론 예수는 신의 아들이고, 레플리컨트는 거대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타이렐사의 생산품이다. 하지만 레플리컨트가 인간의 제한적 욕망을 구체화시킨 욕망의 집산체라면, 예수 역시 메시아를 갈망, 상상, 디자인해온 인간의 무제한적 욕망의 구체화된 집산체란 점에서 소름 돋는 공통점을 갖는다.
--- p.243
왜 한글 자막에서 여성 캐릭터 혹은 레플리컨트만 존댓말을 사용하는 걸까? 아마도 처음 〈블레이드 러너〉가 수입될 당시의 한국 사회상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여성 혹은 논휴먼(레플리컨트)의 위상이 한국 사회에서 그다지 존중받지 못하는 위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수십 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해당 자막이 업데이트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디테일에 그리 신경 쓰지 않는 무심함, 혹은 아직도 한국 사회의 인식이 그 정도라는 것. 어느 쪽이든 썩 편치 않은 현실이다.
--- p.2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