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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나의 만다라

창, 나의 만다라

수우당 수필선-002이동
강천 | 수우당 | 2021년 06월 16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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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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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1년 06월 16일
쪽수, 무게, 크기 196쪽 | 294g | 153*210*10mm
ISBN13 9791197225949
ISBN10 1197225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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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 한 송이 피었으면 좋겠다
고요한 산사의 청량한 풍경 소리처럼 선암사 선암매, 그윽한 향기 온 창가에 퍼졌으면 좋겠다. 뎅그랑 뎅그랑 빠르지도 느리지도, 바쁘지도 게으르지도 않게, 오로지 제 뜻대로 숨결 가다듬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가만히 눈 감고 절간 처마 밑에서 이는 바람 맞으며 세상사의 근심일랑 잊어보면 어떨까. 무한한 초월, 바라는 게 없으니 버릴 것 또한 없을 테지. 육백 년을 살았으니 무상함도 알 터인데, 봄마다 피는 꽃은 또 무슨 심사일까. 득도한 고승의 미소처럼 웃는 듯 마는 듯, 선암매가 읊어주는 해탈의 오도송 그 청량한 소리 한 번 들었으면 좋겠다.
--- p.14

가을은
가을은 쉬엄쉬엄 걷는 것이다. 개울가에 퍼질러 앉아 너부러져 있는 억새의 하소연에 맞장구쳐보자. 흘러가는 흰 구름도 한 바가지 들이켜 보자. 고추잠자리 앞에서 손가락을 뱅뱅 돌려도 보고, 멧비둘기에 ‘훠이’ 심술도 부려 보자. 한 자락 더 가지려 길길이 날뛰다 이리 자빠진 게 아니냐. 해 저물고 낙엽마저 떠나는 늦가을인데 재촉할 게 무어 있나. 쉬엄쉬엄, 띄엄띄엄, 뚜벅뚜벅 가노라면 저절로 만나질 끝 길인 것을.
가을은, 가을은, 가을은 가만히 놓아두는 것이다. 다 팽개쳐놓고 걷노라면 언젠가는 길섶에서 방긋 웃는 구절초 한 송이도 만나게 되겠지.
--- p.106

네놈이 나이테를 알겠느냐
흉금 넓은 느티나무가 보다 못해 ‘꽁’ 하고 꿀밤이라도 한 방 먹인 모양이다. 겁 모르고 날뛰던 강아지풀이 어느 사이엔가 시무룩해졌다. “요 녀석아, 네가 아무리 높은 곳에 섰다고 날뛰어도 한 바가지 물만 아는 웅덩이 속의 송사리고, 평생을 살아도 눈보라를 볼 일 없는 여름철의 매미와 같은 신세일 뿐이다. 네놈이 머리 꼭대기에서 호시탐탐 알곡 터지기만 기다리고 있는 참새를 보았겠느냐, 몇백 겹으로 쌓아놓은 내 나이테를 알겠느냐.”
“사방의 바다가 끝이 없어 보이나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크기를 헤아려 보면 큰 연못 가운데에 난 소라 구멍 정도에 불과하다.” 약의 말씀이시니라, “이놈아.”
--- p.109 ~ 110

잡초론
잡초란 없다. 다만 인간에게 선택되지 못했을 뿐이다. 밀밭에서는 보리가 잡초고 무밭에서는 배추가 잡초다. 볏논에서는 찰벼가 잡초고 콩밭에서는 참깨가 잡초다. 살아가는 일이란, 선택일 수밖에 없다. 나의 삶과 가까운 것들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러우면서도 인간다운 행위가 아닌가.
와지끈, 왕고들빼기 허리 부러지는 소리에 질끈 눈을 감는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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