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별다른 의미는 아니야. 그냥 밥은 한번 사주고 싶었어. 그것뿐.”
혼자 잘 먹고 잘 살자고 떠난 사람이.
“스페인에서 있을 땐 비싸고 좋은 밥은 못 사줬으니까.”
“…….”
“이런 밥 정도는 얼마든지 살 수 있을 만큼 성공했다고, 내가 너한테 유세 떠는 거야. 부담 갖지 말고 먹어. 묵은 찝찝함 해결하는 중이니까.”
그는 여전히 모든 행동을 멈춘 채원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 밥뚜껑을 열어주었고, 이어 본인의 식사에 열중했다.
채원은 잠시 눈을 감고 기도를 한 뒤, 천천히 그를 따라 젓가락을 들었다.
혼자 잘 먹고 잘 살자고 떠난 사람이.
그의 말에 변명의 여지는 없었지만, 그래도 전하지 못할 말을 하나 덧붙이자면.
“간은 맞아?”
“네. 맛있네요. 정갈하고.”
잘 먹고 잘 살자고 떠난 나. 당신의 말은 어느 곳 하나 틀린 구석이 없었지만.
“남기지 마. 벌 받는다.”
잘 먹고 잘 살길 희망한 건, 내가 아닌 당신이었다.
잘되라고. 부디 잘 살라고. 나는 내가 아닌 당신을 위해 빌었다.
--- pp.214-215, 『1권』
다시 만난 너에게서 나를 지키는 일이란, 지나치게 버거웠다. 나는 나를 지키는 것에 혈안이 되어 너를 지나칠 겨를도 없었다.
“제자리로 돌아가려고 하지 마. 그냥 지나쳐. 처음으로 돌아가려고 할 필요 없어.”
……그러니 도망쳐야겠지.
“그런 노력 자체가 너를 힘들게 하는 거야. 제자리라는 건 존재하지 않으니까, 사실은 우리 모두 돌아갈 곳이 없다고. 그냥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야.”
있잖아, 나는 이제야 좀 알 것 같다. 낫는다는 건, 아문다는 건 상처가 없던 때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고 흘러도, 무슨 짓을 또 어떻게 해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던 때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걸. 아주 낮고, 아주 깊게 가라앉아 흔적조차 찾을 수 없던 상처들마저 어느 순간 튀어 올라오는데.
“이거 하나만 좀 묻자. 보내기가 싫은 거야? 솔직하게 말해봐.”
절망이란 그런 순간, 그런 때에 찾아오더라. 나았을 거라, 혹은 아물고 있다 믿었던 상처가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 머물러 있음을 알게 될 때.
인정할게. 나는 네게서,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음을.
--- p.246, 『1권』
“대표님 아직 저한테 미련 같은 거.”
뒤로 돌아가지 못할 시간 속에 발을 담갔다.
“아, 아뇨. 그러니까 제 말은요. 아닌 줄 알지만 그냥 갑자기 혹시나, 혹시나 만에 하나 대표님이 눈곱만큼이라도 미련이 남…….”
“맞아. 남았어, 미련.”
“…….”
“남았더라, 미련이.”
……옅게 밀려오는 바람에 지난날이 실려 온다. 어둠 위로 수놓이는 별들이, 사실은 너의 마음도 반짝인다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속 시원히 좀 말할게.”
반짝인다.
“나, 너 못 잊었어.”
당신이 뱉어낸 말들에 물들어.
“그래서 기다렸어. 니가 물어봐줄 때까지.”
나 홀로 견뎌온 어두운 이별 속에.
--- pp.388~389, 『1권』
……그의 품.
시야가 캄캄해졌다. 그의 가슴에 폭 안겨 숨을 내쉬니 언제까지고 이렇게, 안겨 있고만 싶어졌다. 이 기가 막힌 충동에 스스로가 놀라 커진 눈동자를 어쩌지 못하고 연거푸 굵은 숨만 내쉬었다.
“병가니 산재니, 다치면 곤란하다 너.”
조금 더 중심을 잡으라는 듯 그가 앞으로 더욱 끌어당긴다. 이품에 안겨 있기를 좋아했던 내가 떠올라, 가슴은 미친 듯이 뛰어올랐다.
“두통은 좀 어때.”
“괜찮아요.”
이 사랑, 붙잡고 싶다. 이 남자, 놓치고 싶지 않다.
“컨디션은 좀 나아졌나?”
“……네. 최고예요.”
내내 그런 생각만 맴돌았다.
--- p.441, 『1권』
이게 당신의 답인 것만 같다. 언제든지 돌아서 달릴 준비가 된 나를 알고, 새 구두를 신겨주며.
도망치다가 다치지 말라고. 부디 조심히 가라고.
“내가 너한테 듣고 싶었던 게 몇 개 있는데 성의껏 답해줬으면 좋겠어.”
넘어지지 말라고.
“나, 너랑 왜 헤어졌어?”
……도망쳐야 할까. 신은 구두에 핑계를 싣고, 당신의 세상을 헝클어트리기 전에.
“내 마음이 모자랐나? 아니면 미래가 불안했나?”
터진 마음에 당신의 숨마저 잠기기 전에.
“나한테만 이렇게 시간이 길었어? 나 어떻게 잊었어?”
석 달. 그는 넉넉할 것 같지 않은 시간 앞에 초조했고.
천 일. 그녀는 더디고 느린 시간 앞에 망연자실했다.
“대답 좀 해봐. 나 어떻게 잊었는지.”
“…….”
“갈 거면, 알려주고 가.
--- pp.31~32, 『2권』
그런 공간에, 그를 남겨두고 사라졌다.
눈을 뜨면 아무것도 변한 것 없는 공간에 그를 가둬둔 채, 나 홀로 새로운 세상에 뚝 떨어져버렸다. 짐을 챙길 정신이 없었으니 그와 관련된 물건은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했다.
“이거 말고…… 또 뭐 있어요?”
“뭐가?”
“그냥요. 스페인에서 가져온 다른 물건이 또 있냐구요.”
어느 날은 그랬음에 감사했다. 지척에 당신이 묻은 것들을 두고, 내가 온전했을 리 없으니까.
“더 있는 것도 같은데 잘 모르겠어."
--- p.146, 『2권』
“그거 알아요? 시계 선물해주면 그 사람의 시간을 소유하고 싶다는 거래요.”
……언젠가 그녀에게 구두를 선물했을 때가 떠오른다. 그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좋은 의미네. 미신이라도 믿고 싶다.”
손끝만 만지작거리다가, 그녀의 손바닥을 쥐었다. 자연스럽게 손가락을 포갰다.
“그래서, 내 시간 다 소유해보게?”
“음, 할 수 있다면?”
“장족의 발전이네.”
“매달려보라면서요.”
지친 하루의 끝, 그녀가 보여주는 마음에 이를 데 없는 위로를 받는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늘 하루가 내심 고되었다고 그는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작게 숨 쉬었다.
“부탁해. 내 시간 다 가져, 다.”
내가, 너 때문에 산다.
“다 너 줄게.”
너, 이번엔 나 못 피해.
--- p.377, 『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