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운의 동학은 이 천주학과 유학을 극복하고 ‘지금 여기’ 이 땅 백성들의 고통에 응답하는 우리의 길, 우리 학문을 내놓고자 한 것이다. 서학에 대응하여 동학을 내놓았다는 기존의 해석을 딱히 틀렸다고 하긴 어렵다. 분명 수운 선생에게는 서학에 대한 비판의식과 서세동점의 위기감이 있었다. 하지만 동학의 ‘동’을 ‘서’에 대한 ‘동’으로만 보기보다는 ‘동국의 동’으로 읽을 때 19세기 당시 조선 백성들의 고난에 응답한 우리 학문, 우리 종교라는 훨씬 넓은 지평이 열린다. 그래야 동학은 과거의 사상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의 ‘우리 학문’이 되는 것이다.
--- p.67
○ 동학을 창도한 결정적인 계기는 1860년 경신년의 종교체험이다. 수운은 신비체험이라고도 하는 이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통해 이전 사상의 단순한 종합이 아닌 동학의 독자적인 지평을 열어냈다. 이 장에서는 수운이 종교체험을 하게 된 경위와 그 의미를 살펴보자. 1860년 그의 나이 37세 되던 해 4월 5일이었다. 이날 그는 몸과 마음이 함께 떨리고 이상한 기운에 휩싸이면서, 돌연 허공에서 신비한 존재의 음성을 듣는다.
--- p.69
○ 우리나라처럼 이성의 충분한 반성 작업(서구적 근대)을 거치지 않은 나라에서는 사실 이성과 합리성의 추구가 간과할 수 없는 과제이기는 하다. 반면 학교 교육이 서양 학문 위주로 재편되면서 서양 근대가 초래한 부작용 역시 우리 사회에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이것을 최소화하는 안전장치 역시 확보할 필요가 있다. 이 작업은 1990년대 이후 포스트 담론 책들이 많이 소개되면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논의는 서양의 관점에서 나온 결과물로, 그들과 다른 배경을 가진 우리 사회에 그대로 적용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그 가능성을 동학에서 찾고자 한다. 이성의 합리성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우리 존재의 심연을 회복하는 것, 종교이면서도 종교가 아닌, 불연이면서도 기연인 지혜를 따라 인간이 가야 할 보편적인 길 또는 삶의 기술로서의 학문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단순한 지식에 그치지 않고 인격과 삶의 양식을 변화시키는 신앙과 수행을 겸비한 ‘우리 학문’, 신앙과 수행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종교이긴 하지만 또한 종교를 넘어서는 보편적 인간학의 가능성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 p.106
○ 수운의 우주 이해는 그 체계에서는 성리학의 기론(氣論)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를 ‘영적인 실재’로 보는 점에서 차이가 있으며 천주(한울님)를 그 체계 안에 적극적으로 자리매김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한울님을 체험할 수 있으며, 또한 적극적으로 공경해야 한다고 하는 점에 그 차별성이 있다고 하겠다. 이렇게 수운의 우주론은 전통적인 이기론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그의 종교체험을 통하여 경험한 천주를 이기론의 체계 속에 포함시킴으로써 서양의 유일신 전통과 동양의 범신론적 전통, 초월성과 내재성, 타력적 신앙 전통과 자력적 수행 전통이 절묘하게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 p.115
○ 동학에는 수행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불교와 마찬가지로 동학의 핵심 역시 수행, 수도(修道)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동학에서는 ‘수행’보다는 주로 ‘수도(修道)’라고 한다. 지금까지 동학을 동학혁명으로 대표되는 운동단체나 정치적 조직으로만 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게 아니라도 그저 민중의 기원에 응답하는 종교 사상으로 보아 전문적인 수행이나 깨달음을 추구하는 전통이 없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동학은 앞장에서 보았듯이 높은 수준의 형이상학을 갖추고 있으며, 여타의 동양 종교들처럼 수행을 통해 완전한 인격과 깨달음에 도달하고자 하며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한다.
--- p.150
○ 동학 수련은 인간 존재를 몸과 마음, 성품의 세 차원에서 보고, 성품과 마음과 몸의 삼단(三端)을 같이 닦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동학의 수련은 세 가지를 하나로 닦는 공부, 셋이 본래 하나요, 하나가 셋으로 나눠진다는 우리 고유의 ‘삼일철학’과 맥이 닿는다. 이는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의 고유사상,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에 나오는 포함삼교(包含三敎), 접화군생(接化群生)의 풍류도, 즉 유교의 성의정심(誠意正心)과 불교의 각성(覺性) 공부와 도교의 양기(養氣)를 겸해서 나온 우리의 선교 전통에서 비롯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런 측면이 동학의 수련이 몸과 마음과 성품을 같이 닦고, 또한 수도가 개인의 깨달음에 그치지 않고 늘 사회적 실천으로 연결되었던 까닭이었다고 볼 수 있다.
--- p.186
○ 수운의 개벽은 일차적으로 정신개벽이다. 즉 시천주적 삶으로의 변혁을 의미한다. 모든 존재가 한울의 신령한 생명의 본성으로 말미암았음을 깨닫고 사람을 한울처럼 높일 뿐 아니라 뭇 생명마저 신성한 존재로 공경하는 한울마음으로의 전면적 전환, 그로 인한 완전한 인격의 실현을 의미하는 것이다. 청빈하되 온화한 마음을 회복하여 삶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 생명과 영성의 자각을 통해 모심과 살림의 거룩한 사회적 성화를 이루는 것, 이것이 동학이 꿈꾼 후천개벽이다. 그러므로 동학은 수행을 바탕으로 인류의 문명을 근본적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종교이다. 그것은 시천주의 모심과 섬김을 바탕으로 한 생활양식의 전면적 전환, 인류 문명에 대한 근본적 반성과 대안으로서의 치유이다. 그것이 개벽이다.
--- p.243
○ 동학은 밑바닥 민중의 고난과 고통에 관심을 갖고 동양의 지혜를 바탕으로 서양의 영성을 흡수해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재정립했을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차원을 아우르면서 삶의 신비와 영성을 되살려냈다. 동학은 오늘날처럼 서양적 사고와 철학, 제도와 체제를 기반으로 한 근대 문명이 한계에 부딪히면서 인간의 ‘존엄’이 위협받고, 생태계가 파괴되고 삶의 신비가 가려질 때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는, 변방의 것이지만 보편성을 띠는 철학이자 종교이다.
--- p.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