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그는 만나는 여자들이 자신에게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도록 처신했다. 모든 감정의 개입을 배제하는 것만이 자신의 자유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는 마치 병적인 허기증을 앓고 있는 사람처럼, 삶이 포함하고 있는 모든 경험과 쾌락 그리고 모호한 약속들을 모두 먹어 치움으로써 거덜 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p.17
두 사람이 함께하는 역사의 시작은 종종 마법과 같은 양상을 띤다. 하지만 실상은 가장 부담스럽고,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다. 그런 이유로 그 시점이 이 이야기의 출발점이 되었다. 상호적인 역할이 명백해지며, 힘의 관계가 자리를 잡고, 연인들 사이에 암묵적인 계약이 맺어지면서 훗날 그 계약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이 불가능해지는 등 모든 것이 결정적으로 고착돼 버리기 때문이다.
--- p.24
요정들의 유혹에 넘어갈 것이 두려워 자신이 타고 있던 배의 돛대에 손을 묶어 놓게 했던 오디세우스가 떠올랐다. 그와 마찬가지로 트리스탕 역시 자유로운 삶을 살며 여자들을 유혹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모든 것과의 접촉을 피했다. 이처럼 잔인한 얼굴을 드러내는 세상이 트리스탕에게는 마치 벌거벗은 여인, 절대로 만져서는 안 되는 알몸의 여인이나 손과 발이 묶인 채 끊임없이 발기하면서 갇혀 있어야 하는 욕망의 감옥처럼 느껴졌다.
--- p.28-29
트리스탕이 아멜리를 만난 것도 그런 식이었다. 그들의 만남은 통속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어느 날, 거리에서 그의 앞에 나타났고, 그 이후 그의 삶 속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겨우 억누르곤 한다. 자신이 그녀 곁에 머물면서 놓치게 되는 모든 것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가 거리에서 마주치는 여자들에게 보내는 시선 속에는 관광객의 시선처럼 바로 그 결핍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한다.
--- p.33
그는 여자들과 경제력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매우 빨리 파악했다. 게다가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어떤 종류의 차라도 좋다. 차가 비쌀수록 멋진 여자를 만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누가 운전하느냐는 상관없다. 19세기에는 여자들을 통해 권력과 돈을 쟁취할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힘과 돈을 가진 사람이 좀 더 쉽게 여자들에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 p.35
이전에는 삶의 자양분을 취하기 위해 여자들을 만나곤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엄청난 식욕, 생존과 관련된 일종의 병적인 허기증과 같은 욕구를 충족시킬 뿐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쾌락의 직접적인 대가로 아멜리의 고통이 동반된다는 사실을 안다. 따라서 쾌락은 새로운 의무를 동반하면서, 그에게 방탕이라는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 p.57
때로는 자신의 매우 어두운 부분, 죽이고, 소멸시킬 수도 있는 과도한 폭력성이 엿보이는 자신과 만나게 될 때가 있다. 그러나 그런 충동들이 부분적으로 표출되기도 하지만, 폭력성에 의해 스스로가 고양되기도 한다. 어떤 신비주의자들은 말할 것이다. 우리가 신의 존재를 느끼는 것은 그의 벨벳같이 부드러운 은밀함 속에서가 아니라 흐느낌과 굴욕으로 황폐해진 극한 상황 속에서라고.
--- p.79
그 후에도 그때와 똑같은 추락, 사라져 버리기의 욕구를 느낀 적이 있었다. 마치 끊임없이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것처럼 누군가 자신을 구하러 오게 하기 위해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기도하는 행위도 그와 다를 게 무어란 말인가.
--- p.88
그렇다, 그것은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연인들의 우스꽝스러운 환상이다.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그들은 영원을 이야기한다. 형편없는 시인들처럼, 그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것의 힘을 믿는다. 그리고 우리들처럼, 그들은 진부함이라는, 가장 슬픈 비굴함 속으로 빠져 든다.
--- p.106
슬픔이 몰려왔다. 모든 것은 사라지고, 시들고, 썩어 버리도록 운명 지어진 것 같았다. 언젠가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언젠가는, 그들도 서로 미워하게 될 것이다. 시작은 아무 의미도 없다. 시작은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사라져 버린다.
--- p.118
'우월한 존재들은 고독한 법이야.' 트리스탕은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지금 자신이 예전에 원하던 모습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삶이 영웅적이기를, 숭고한 삶이 되기를 바랐지만, 보잘것없는 목표와 쓸데없는 까다로움, 하찮은 쾌락들을 좇으며 삶의 초반부를 망쳐버렸다. 위대한 열정에 사로잡혀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것을 위해서도 자신을 불태울 줄 알며,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찬란하게 빛나길 바랐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관대하고 고귀하며 굳건하게,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황에 빠져 들지 말고 하찮음에 자신을 내던지지 않으면서, 하나의 절대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줄도 알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젠 모든 것이, 그는 미적지근한 과에 속하는 존재임이 명백하다.
--- p.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