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시대부터 오늘날 디지털 시대에 이르기까지, 기술혁신은 인류 문명의 발전에 가장 핵심적인 동력이 되어 왔다. 전통적인 경제학 이론에 의하면 노동과 자본이 경제발전의 토대라고 인식되어 왔지만, 오늘날 기술혁신이 노동과 자본 이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노동과 자본 등 전통적인 생산 요소의 증가로 이룩한 경제성장보다 기술혁신에 의한 경제성장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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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발전에 따라 지식과 사상이 널리 확산되면 혁신과 변화가 일어날 수 있고 기존 질서와 지배 계층에 커다란 위협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서양에서도 구텐베르크 금속활자 인쇄술이 개발된 이후 인쇄허가제도를 통해 왕실이 일정한 수익을 올리면서 동시에 지식과 사상을 통제하려고 했다. 1605년에 출판된 『돈키호테(Don Quixote)』의 서문에 잘 소개되어 있는 스페인 왕실 인쇄 허가장을 보면, 왕실이 서적 인쇄 허가 여부를 결정하고 더 나아가 서적의 가격까지 정했다. 왕실은 인쇄허가제도를 통해 왕권이나 지배층의 이익에 도전하거나 위협이 되는 사상이나 종교를 통제할 수 있었다. 스페인은 인쇄 허가를 통해 지식과 시장을 통제하고 가톨릭 이외의 신교도나 이교도를 잔인하게 처벌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 당시 진행되고 있던 과학혁명으로부터 소외되고 무적함대의 패망을 계기로 국력이 쇠퇴했다. 스페인보다 더 극단적인 사상 통제는 오토만 제국에서 볼 수 있다. 1485년 오토만 제국의 술탄 바예지드 2세는 아랍어 인쇄 행위를 전면 금지했고, 18세기에 겨우 인쇄소의 설립을 허용했지만 인쇄상 오류 방지 명목으로 이슬람 율법에 정통한 종교학자의 확인을 거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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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봉건 시대까지 서양은 동양에 비해 기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낙후되어 있었지만, 르네상스를 기점으로 과학기술의 발전을 이룩하고 산업혁명을 계기로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동양보다 훨씬 앞서 나갔다. 서양과 동양의 생산력과 군사력이 산업혁명을 계기로 명확히 바뀌었지만, 사실 그러한 변화는 40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 르네상스 때 이미 시작되었다. 르네상스가 시작된 14세기경 중국과 조선에서는 유교적 사상과 신분 구조 및 쇄국주의가 강화되기 시작한 반면, 서양에서는 봉건적 신분 질서가 무너지고 기독교의 엄격한 구속에서 벗어나 인본주의 예술과 새로운 사상이 뭉게구름처럼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는 구텐베르크의 활자 인쇄술로 유럽 대륙 및 영국으로 확산되었고, 새로운 철학과 사상, 우주관, 세계관, 과학기술의 씨앗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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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는 새로운 과학적 발견을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에 반영하기 위한 기술혁신과 연구개발의 열기가 식어 가는 반면에, 19세기 중반 남북전쟁을 끝낸 미국에서는 정부와 기업들이 기술혁신 및 연구개발에 적극적으로 투자했다. 영국에서 회사제도가 시작되었지만, 주식회사가 번창하고 회사 중심의 자본주의가 꽃을 피운 곳은 미국이다. 영국에서는 상공업으로 성공한 기업가들이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과 지위를 즐기고 대다수 노동자는 선술집(pub)과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서민들만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었지만, 미국에서는 보다 자유로운 환경에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기술혁신과 투자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2차 산업혁명을 꽃피우기 시작했다. 18세기 후반부터 영국이 석탄과 철을 생산하고 증기기관으로 산업혁명에 성공했다면, 19세기 후반부터 미국은 전기와 석유를 사용해 자동차, 기차, 비행기, 라디오, 화학섬유, 다양한 금속 등을 생산함으로써 훨씬 빠른 속도로 그리고 더 큰 규모로 2차 산업혁명을 성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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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노사분쟁노사분쟁과 상당한 임금인상을 경험하면서, 국내 기업들은 저임금에 의존한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탈피하고, 스스로 연구개발과 독자적인 기술혁신을 토대로 기술집약적 산업으로의 변화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 기술의 연구개발에는 많은 비용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국내 기업들이 그 연구개발이나 기술혁신의 결과물을 보호할 필요성도 점차 커졌다. 따라서 1980년대 들어 특허권 등 지식재산권 보호를 강화할 필요성에 관한 국내 수요가 조금씩 증가했다. 지식재산권 보호 필요성은 국내 기업의 수요뿐만 아니라 외국 통상 압력의 핵심에 해당하기도 했다. 1986년 한미 무역협상 당시 미국은 한국과의 무역에서 63억 달러가 넘는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고, 무역적자 해결책의 하나로 외국의 지식재산권 보호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러한 국내외 수요와 압력에 따라, 1986년 말 한국의 지식재산권법은 대폭 개정되고 지식재산권 보호가 강화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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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 완화를 통한 기술혁신은 현재 진행 중인 4차 산업혁명에서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 규제 완화로 개인과 기업에 자유가 주어지고 특허권과 같은 인센티브가 주어지면 기술혁신이 촉진되지만, 기존 시장이 파괴되고 새로운 시장이 만들어지는 창조적 파괴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 규제 완화와 창조적 파괴를 위해서는 그에 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에 관한 기술혁신에 어떠한 규제 완화가 필요한지, 그로 인한 시장 변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개인정보의 보호를 위한 규제도 필요하지만, 익명화 또는 가명화를 통한 데이터 분석과 기술혁신을 도모하기 위한 사회적 합의도 필요하다. 21세기 대한민국이 재도약하기 위해서 규제완화와 기술혁신이 필요한데, 그 사회적 합의는 17세기 영국의 명예혁명, 18세기 프랑스의 대혁명, 19세기 미국의 노예해방 이상으로 어렵고 고통스러운 과정일지 모른다. 동양과 서양의 기술혁신이 어떠한 배경과 원동력에 의해 이뤄졌는지 되돌아본다면, 21세기 대한민국이 규제 완화와 기술혁신에 필요한 지혜를 찾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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