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최초의 쿠데타는 언제 있었을까? 남겨진 기록에 따르면 지금부터 2200여 년 전인 BC 194년이다. 위만이 자신을 받아준 고조선의 준왕을 배신하고, 왕검성의 새로운 주인이 된 것이다.
--- 첫문장 에서
한국사 연구자 사이에서는 한 가지 의미 있는 ‘결정’이 있었다. “수천 년 한국사의 흐름을 바꾼 역사적 결정을 찾고, 그 의미를 새겨 보자”는 취지에 따라, 각 대학 교수, 연구원, 재야 역사학자, 역사작가 등이 함께 의견을 내고 하나로 취합하여 ‘한국사를 바꾼 결정들’을 선정하기로 한 것이다. 101명이 참여한 이 결과는 『월간중앙』 별책부록인 「역사탐험」 제8호에 개제되었다.
--- 「책머리에」 중에서
광개토왕의 중국 공략은 한국과 중국의 경계선을 모호하게 만들었으나, 결국 요하를 넘어 더 나아가지는 않음으로써 고구려 역사가 한반도 쪽으로 확정되었다. 그런 사실을 오늘날의 동북공정 관련 논쟁에서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 「395년 고구려의 중원 정벌- 대륙을 달리다」 중에서
한국사에서 천도는 수없이 많았으나, 이 책에서 중요한 역사적 결정으로 꼽은 천도는 고구려의 평양 천도를 비롯해 백제의 공주 천도, 고려의 강화도 천도, 조선의 한양 천도가 있다. 여기에 천도를 계획했으나 실패한 사례로는 묘청의 난과 노무현 정부의 수도 이전 계획이 있다.
--- 「수도를 바꾼다, 시대를 바꾼다 - 천도」 중에서
천 년 가까이 과거제를 시행하면서 우리는 얻은 것도 많으며, 잃은 것도 많다. 서구에도 오랫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고도로 합리적인 관료제, 국민 모두가 기회만 되면 공부하려는 분위기,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 등은 분명 소득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재능 있는 젊은이들을 시험지옥에 빠트림으로써, 발명, 발견, 과학기술 연구 등에 쓰일 수 있었을 능력이 허비되기도 했다.
--- 「958년 과거제 도입 - 900년간 이어온 ‘인재 등용의 혁명’」 중에서
성리학이 이 땅에 들어온 것이 과연 축복일까?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고려조까지의 활발한 대외관계, 비교적 평등했던 남녀, 과학기술의 발달 등이 조선조에 들어와 정체되고 악화된 것, 그리하여 근대화가 늦어지고 결국 식민지로 전락한 것이 성리학 때문이라는 것이다.
--- 「1288년 안향의 성리학 수입 - 거대한 뿌리 심겨지다」 중에서
『조선왕조실록』은 1, 893권 888책에 이르는 규모로 보나, 세밀함으로 보나 세계에 자랑할 만한 귀중한 책이다. 서양문명이 『성서』를, 중국문명이 『사서삼경』을 내세운다면, 한국은 이 『조선왕조실록』을 내세워야 하리라. 그 속에는 시대를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다 간 사람들의 숱한 고뇌와 희비가 있고, 중요한 정론과 이론의 대결이 있으며, 정치, 사회, 경제, 문화, 과학의 온갖 정보가 빼곡히 들어 있기 때문이다.
--- 「1409년 『조선왕조실록』 편찬 결정 - 실록 편찬을 둘러싼 갈등」 중에서
한편 『동의보감』은 중국과 일본에서도 다투어 수입, 간행하여, 조선에서 만들어지는 중에는 동아시아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유일한 책이 되었다. 실록에 보면 조선에 온 중국 사신들이 병에 걸리면 『동의보감』부터 달라고 하여 치료에 참고했고, 돌아갈 때 다른 선물은 마다해도 『동의보감』만은 챙겨갔다고 한다.
--- 「1596년 동의보감 편찬 결정 - 독자적 의학체계를 구축하다」 중에서
당시 고종은 조선 대표들을 불러 “국가적 체면을 손상하지 않고 무사히 일을 마쳐 다행이다”라며 치하했다. 국치 國恥에 가까운 개방을 당해 놓고도, 세자의 생일을 겸하여 나라에 경사가 났다며 널리 사면령을 베풀고 노인에게 술과 고기를 대접하며 흥청거렸다.
결국, 당시 임금과 신하는 강화도조약의 진짜 의미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 「1876년 강화도조약 - 역시 믿을 수 없는 회담」 중에서
이제 민중은 죽었다. 아무도 자신을 민중이라고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이익과 우리의 정의를 구한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가 모든 것을 나쁘게 만들고 있다고 믿는다. 사실은 하나에서 열까지 바로 ‘나’ 때문에 나빠졌는데도.
--- 「1894년 동학농민운동 - 자주를 외친 대중의 첫 목소리」 중에서
김일성 독재를 조금이라도 견제할 만한 세력은 철저히 숙청당했다.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결정을 내린 그는 83세까지 최고의 권력과 쾌락을 누리며 살았다. 남한도 비슷했다. 이승만은 전쟁을 시작한 당사자는 아니더라도 전쟁 발발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오직 안보를 무기로 독재 권력을 확보했다.
--- 「1950년 한국전쟁 - 한반도 냉전 심화의 결정적 계기」 중에서
결국 6월 항쟁은 ‘미완의 혁명’으로 끝났다. 국민의 분노에 따라 물러난 독재자 대신 정권을 잡은 옛 민주당이 도무지 국민의 뜻을 따르는 정치를 하지 못했듯, ‘1노 3김’의 정치 역시 갈수록 국민에게 실망만 가져왔다. 그들이 밀실에서 합의한 ‘6공화국 헌법’이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적당히 절충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 「1987년 6.10 수용한 6.29 - 한국의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게 된 절반의 승리」 중에서
다만 분명한 것은 이제 한국인은 실질적 이익이 걸린 불평등만이 아니라, 상징적인 불평등조차 참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조선왕조 5백년 간 우리의 ‘민족성’에 뿌리내린 두 가지 특성 중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계기로 소멸에 접어들었다면, 이제 ‘동방예의지국’ 역시 그 길을 걷고 있다는 것 뿐.
--- 「2005년 부계성 강제조항 폐지 - 동방예의지국은 없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