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가치를 돈으로만 따지는 우리 사회 일부의 모습은 정신이나 문화 측면에서 ?상놈니제이션’이란 표현이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전에 관계없이 컨테이너 한 개라도 더 싣는 게 이익이라는 세월호의 인식, 수많은 생명을 희생시키고도 책임을 회피하는 행태, 그 주변의 여러 조직들의 무책임하고 방만한 실태는 우리 정신의 상놈니제이션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악다구니하며 떼를 쓰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떼법 만능주의, 교통신호등을 지키지 않더라도 나만 지나가면 그뿐이라는 의식 수준, 쓰레기 투기, 음주운전 등은 사소하지만 상놈니제이션의 전형을 보여준다. 체면이 밥 먹여주지 않고, 예의와 염치가 돈이 되지 않는다는 단편적 사고는 습관성 체념에서 비롯된 도덕성 결여의 한 양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니 우리 사회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은 감히 기대할 수조차 없는 것인가.
--- p.64, 「상놈니제이션 」 중에서
트로트는 대개 매우 애절한 슬픔의 노래이며,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행복해질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관, 고향을 떠나 정착하지 못하는 나그네의 슬픔 등을 내용으로 삼아 일견 비판적이기도 하다. 거기다 일본 대중가요의 강력한 영향 아래에서 형성된 양식이라는 점에서 ‘왜색’, ‘일제 잔재’로 청산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신파적 질감이 낡고 세련되지 못한 부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져, 비판의 초점이 된 측면도 있었다. 지난날 많은 금지곡이 이를 증명한다.
--- p.86, 「트로트 만세」 중에서
가난해도 본인만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일자리 구해 중·상위층이 될 수 있는 ‘교육의 계층 상승 사다리’가 사라졌다고 한다. 즉 ‘개천에서 용 나던 시대’는 갔다는 말이다. 최상층과 최하층의 학력 차는 2,30년 전보다 더 벌어졌다는 것이다. 교육 양극화가 더 심화되었다는 말이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모든 학교와 학생은 동일하다는 허망한 이상주의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학생들은 빈부격차도 심하고 학력 격차도 심한데, 공교육은 그저 ‘학생들은 똑같이 가르쳐야 한다’는 평준화 허상에 갇혀 있다. 유럽의 구사회주의권 국가들도 ‘평등’을 넘어 ‘경쟁’과 ‘효율’을 모색하고 있는 지금이다. 가난한 집 아이일수록 열악한 학교에 들어가 부실한 교육을 받고 그 결과 어른이 돼서 경쟁력이 떨어지는 악순환이 벌어지는 것이다. 모든 학생에게 똑같은 교육을 제공하고 학교 선택권을 제한하는 ‘기계적 평등’은 참된 ‘평준화’가 아니다. 교사가 학생들의 학업 성취를 개인별로 세세하게 파악해 개별 학생 수준에 따라 맞춤식 교육을 제공하는 수준별 학습이 진정한 ‘평준화 모델’이다. 교육 사다리에서 탈락한 아이들에겐 꿈과 목표가 있을 리 없다.
교육과정을 통해 어느 한 분야에서 자기의 가능성을 실현시켜 나갈 실력을 키우지 못한 사람은 평생 자기 목표 아래 좌절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길이 막히고 만다. 교육의 사명은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 좌절하지 않고 떳떳하게 인정받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실력을 붙여주는 일이다.
--- p.115, 「무상급식 유감」 중에서
옛날에는 복날이 되면 음식과 술을 준비해 산이나 계곡을 찾아 하루를 즐기며 더위를 잊었다. 또한 더위를 먹지 않고 질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여 팥죽이나 수박, 참외 등 제철 과일을 먹기도 했다. 또 삼계탕은 기본이지만 보신탕이나 오리탕, 장어구이, 흑염소 요리, 잉어 삼색찜, 메기 조림, 참붕어 요리, 다슬기 조림 등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양 음식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또 ‘복날마다 한 살씩 나이를 먹는다’는 말도 있다. 복날의 무더운 날씨가 벼를 자라게 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논에서 자라는 벼는 삼복의 더위를 꼭 필요로 한다. 여름은 여름다워야 하고 겨울은 겨울다워야 한다는 말이다. 정치가 정치다워지고, 문화가 문화다워지고, 세상이 세상다워지고, 모든 사람도 사람답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또 있다. ‘여름철에 땀을 흘리지 않으면 가을 감기에 걸린다’는 말이다. 여름철에 적당히 땀을 흘리는 것 자체가 자연스런 건강법이란 이야기다.
--- p.157, 「복날 이야기」 중에서
나는 여태까지 너무 ?아버지’, ?남편’이라는 권위의 허상에 갇혀 맹목적인 존재로 살아왔던 것은 아닐까. 이러다가 아이들이 점점 자라고 아내도 이런 삶에 타성이 붙어서 가족들과의 소통단절을 가져와 나중에는 스스로 고립되는 것은 아닐까. 안 되지, 안 되고말고. 아버지를 되찾자, 가장의 권위를 되살리자 이런 말보다 가정 안의, 가족 속의 내 자리를 빠른 시일 안에 찾아야 한다 싶다. 무엇이, 누가 가장 소중한가를 알았으면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 p.192, 「열린 아버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