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亭子), 선비 문화의 빛과 그늘
정자는 대개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설령 강변에 있는 강정(江亭) 일지라도 배경으로 병풍 같이 두른 산이 보이게 마련이다. 정자는 그야말로 풍경의 중심 같다.
예나 지금이나 정자는 주변보다 높은 지대에 우뚝 서 있다. 곧 정자의 제 1 요건이 전망이다. 정자에 올라 마루 난간에 기대어 앉으면 마치 배를 탄 듯한 착각이 든다. 배를 타고 세상 바다를 한가로이 유람하는 기분이다.
평소에는 누구나 세상 속에 부대끼며 살아간다. 모처럼 나들이 삼아 정자에 오르면 그제야 깨닫는다. 정자에 오르면 비로소 세상을 건너다보게 된다는 사실을. 즉 분주했던 세상이 어느덧 피안(彼岸), 잠시나마 멀찌감치 건너편으로 바라보는 대상이 된다. ‘이런 한가로움을 잊고 살았네!’하고 절로 탄성이 터지기도 한다.
문득 시구(詩句) 하나가 떠오른다.
‘몸이 산 속에 있으면 산의 진면목을 모른다(只綠身在此山中)’. 이 구절은 소동파(蘇東坡 1037~1101)의 시, ‘제서림사벽(題西林壁)’의 결구이다. 이 구절처럼 ‘몸이 세상 속에 있으면 세상의 진면목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누정은 누각과 정자를 통칭하는 말이다. 대개 누각은 관아(官衙)의 부속건물이었던 반면, 정자는 개인의 별서(別墅)가 많았다. 따라서 누각은 팔작지붕에다 기와지붕이 많았고, 정자는 소규모에다 초간모옥(草間茅屋)이 많았다. 예컨대, 누각의 대표 건물로는 경회루, 영남루, 촉석루, 부벽루 등이 있고, 정자의 대표건물은 망우정, 반구정, 소우정 등이 있다.
누정의 형식은 18세기 이후, 다양하게 변한다. 마치 문중(門中)간 누정 경연대회라도 하듯이, 규모도 커지고 용도다 다양하게 바뀐다.
누정의 기능은 기본적으로 유견연식(遊見宴息)이라고 했다. 즉 ‘놀고, 보고, 잔치하고, 휴식하는 곳’이었다. 다만 누각은 관용으로 지방수령이 주최하는 의전(儀典) 행사 차원의 접대 자리였다면, 정자는 정자 주인 개인의 교유 차원의 자리였다는 말이다. 따라서 공사公私 구분만 있지 기능 측면에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1481)』에도 누정(樓亭) 편을 두고, 누정제영(樓亭題詠)을 정리했던 것을 보면, 누정이 얼마나 사랑받는 공간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 책에서는 누각과 정자를 정자로 통칭하기로 한다. 정자라는 말에는 금세 산들바람이 부는 느낌이지만 누정이라고 하면 왠지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듯하기 때문이다.
정자(亭子)의 ‘정(亭)’은 ‘머물 정(停)’자와 통한다. 정자는 기분 전환을 위해 잠시 머무는 곳! 정자에 오르면 시야가 활짝 열리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어느새 일상의 고민이 먼지처럼 훌훌 씻겨 내려간다. 물론 그게 다는 아니다. 누각은 사적인 분위기의 정자와 달리, 공식적인 접대와 연회(宴會)의 공간, 전시에는 전투를 지휘하는 장대(將臺)가 되기도 했다.
누정은 양반들의 전용공간이었다. 마치 유럽 귀족사회의 살롱처럼 양반들만의 공간이었다. 소위 ‘선비문화의 산실’로 불리어 왔다. 따라서 평민들은 애당초 접근이 허락되지 않는 곳이었다.
오래된 정자, 즉 살아남은 정자에는 대개 공통점이 있다. 우선 주변에 늙은 나무(古木), 바로 노거수(老巨樹)가 있다는 점이다. 정자와 노거수는 보면 볼수록 천생연분, 서로 의지하는 찰떡궁합 부부 같다고나 할까. 노거수는 대개 정자와 함께 나이를 먹어 체형(體形)만 봐도 그동안 겪었던 풍상이 떠오를 정도이다. 다음으로 정자 주인의 가문이 비교적 살림에다 고을에서 존경을 받았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이웃한 정자 주인들끼리 끈끈한 교유 관계가 있었다는 점이다.
정자 답사를 하며 오래도록 살아남은 정자의 장수비결을 캐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정자 주인, 노거수, 주인의 가문, 주인과 벗들, 사제 관계 등등............
정자는 ‘선비문화의 상징’이라 일컬어 왔지만, 그 내밀한 사연들을 살펴보면 의외로 실용보다 허세, 문중 간의 체면 경쟁의 산물로 태어난 것들도 많았다. 빛도 있었지만 후대로 갈수록 그늘도 깊었다. 나들이 길에 정자문화의 빛과 그늘을 함께 생각해 본다. 박제된 정자가 아니라 우리네 삶 속의 정자로 되살릴 길은 없을까? '템플스테이(Temple-stay)'처럼 ‘정자에서 하룻밤’도 있었으면 참 좋겠다.
끝으로 이 책을 낙동강 강변 따라 정자 산책을 나서는 분들에게 바친다.
--- 「글머리에」 중에서
詩
성성자 선생
-남명 선생을 기리며
박하
가슴에는 경의검(敬義劍)이요
고의춤에는 성성자(惺惺子) 성성자(惺惺子); 남명 선생이 고의춤에 차고다녔다는 방울의 이름.
방울,
무엇을 베려하고 무엇을 깨우려했던가
태산(泰山) 보다 높게, 사해(四海) 보다 넓게
포부 그대로 산해정(山海亭)이요,
기상 또한 세한송죽(歲寒松竹)이었네
‘겉보리 서 말이면 처가살이 안 한다’는 말,
그럼에도 시종일관 꼬장꼬장했던 선비
숨어서 칼을 갈 듯, 공 들여 탑을 쌓듯
처가동네 들어온 뒤 18년 세월
시동(尸童) 제사를 지낼 때에 조상의 위패 대신 앉혔던 어린아이.
처럼 잠잠하다가도
때가 되면 뇌룡(雷龍)처럼 떨쳐 일어나라!
지행합일(知行合一), 스승에게 배운 뜻 그대로
국난(壬辰倭亂) 앞에 분연히 떨쳐 일어섰던 제자들
스승은 진작 갔어도 곳곳마다 포효하던 창의(倡義)의 깃발,
망우당 곽재우, 내암 정인홍, 송암 김면, 이노, 조종도, 하락 등등
천추의 별이 된 이름들
세상살이, 시들해지는 날이면
마음 다잡아 찾아 나설 곳 있네
김해 신어산 자락, 산해정,
산청 지리산 기슭, 뇌룡정, 산천재
남명의 숨결이 느껴지는 곳들, 어디 그곳들뿐이랴
시편(詩篇) 속에 쟁여둔 빛과 소리
문장마다 번뜩이는 경의검(敬義劍)이요
행간마다 공명하는 성성자 방울소리
무엇을 베고, 무엇을 깨치려는가
--- p.36
詩
영남루를 누가 지었는가
- 무명의 도목수 관노(官奴)를 위하여
박하
밀양에 가면 제일 먼저 영남루 아닌가,
밀양강 위, 수문장(守門將) 같이 버텨선 영남루
애당초 그 누각을 누가 지었는지 아시나요?
솜씨 좋은 관노(官奴)가 지었다는데,
그 관노의 이름을 몰랐다는 게 무슨 곡절인가
고려 말, 1365년 신관사또 밀양 수령(密城知郡事) 김수,
부임하자마자 낡은 영남루에 올라갔다는데,
올라갈 때마다 부아가 치밀어 참다못해 일갈했다네
‘이보게 이방(吏房)! 자고로 왕조의 위엄은 왕궁이 말해주고,
밀양 고을의 위엄은 영남루가 말해주는 법!
자네 눈에는 이리 누추한 영남루가 부끄럽지도 않소
이보게, 이날 이때까지 진주 촉석루는 보지도 듣지도 못했단 말이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우리 밀양이 진주보다 못한 게 뭐요,
인물이 없소, 물산이 없소, 재약산 봉산(封山)이 없소, 그 산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없소
내일 아침, 당장 이 초라한 누각부터 허문 뒤, 새로 지을 방도를 구하시오!
사또나리, 우리 고을에 솜씨 좋은 관노가 있긴 헌데
그 영감이 글쎄, 지금 한 달 째 구들장을 지고 있다는데 글쎄,
사또 말허리 끊고 불호령하듯 내뱉는 말,
말 같잖은 소리 작작하고, 당장 그 자를 내 앞에 대령하시오!
그 관노 아픈 몸을 이끌고 진주 촉석루에 득달 같이 달려갔것다.
기둥과 기둥, 도리와 서까래, 대들보와 용마루까지
영조척(營造尺)으로 구석구석 요리조리 재고설랑,
화선지에다 난초 치듯 가로세로 척척 그림을 그려왔것다.
때는 마침 겨울이라 봉산 소나무 벌채를 감행했고
기초 자리 달구질에, 베어온 재목 마름질이야 대패질이야,
일사천리로 내달리는 것이었다
신기도 신기할사, 어렵쇼, 병약한 그 관노,
하루가 다르게 되살아나는데,
가뭄에 시들어 빠진 벼이삭이 단비에 되살아나듯
마침내 헌헌장부 수문장 같이 영남루가 일떠서자마자
그 관노의 고질병도 씻은 듯 사라지고 말았것다
사또 김수는 덩실덩실 춤추듯
영남루 중수기(重修記)를 일필휘지로 적어 내리는데 글쎄,
관노 이름을 빼먹고 말았네, 실수가 아니라 순전히 고의라네
이런 제기랄,
길섶에 꽃들도 하나 같이 이름이 있는데
하다못해 애기똥풀도 있는데
개도 고양이도 살가운 제 이름이 있는데
종놈이라 괄시하며 이름조차 빼먹었으니............
아서라, 말아라,
조선이 망한 이유, 먼데서 찾을 거 하나 없네
솜씨는 조선팔도 제일의 도목수 뺨치는데도 한번 종놈은 영원한 종놈,
인도의 카스트제도보다 더 견고했던 조선의 신분제
내가 사또였다면 조정에 장계를 올려서라도
댓바람에 면천(免賤)을 시켜주련만...........
꽃다운 처녀가 억울한 죽음을 당한 데는
사당 지어 내리내리 불천위(不遷位) 나라에 큰 공훈을 남기고 죽은 사람의 신주를 오대봉사가 지난 뒤에도 묻지 않고 사당에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
제사지내듯 하면서도
솜씨 좋은 그 관노, 이름조차 잊은 그 도목수는
기억조차 지우려 한단 말인가
그대여, 밀양에 가시거든 제일 먼저 영남루,
헌헌장부 같은 영남루, 애당초 누가 지었는지 물어보시라 밀양 영남루는 1365년 수령 김수의 지시에 의해, 솜씨 좋은 관노의 주도로 준공되었다. 당시 진주 촉석루의 제도를 베끼되, 촉석루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웅장하게 건축했다고 한다. 그때 이후, 수차례 중수를 했지만 본래 모습은 1365년 당시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기왕이면 밀양 사람 붙잡고 물어보시라
--- p.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