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군
장흥군은 전라남도 남부에 있는 군으로 남해안에 접해 있으며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유서 깊은 문화를 지닌 곳이다. 유인도인 노력도와 11개의 무인도를 포함하고 있다. 관할 행정구역은 장흥읍·관산읍·대덕읍·용산면·안량면·장동면·장평면·유치면·부산면·회진면 등 3개읍 7개면 136개 법정 동리가 있다. 행정리는 280개리이다. 군청 소재지는 장흥읍 장흥로이다. 면적 622.41km², 인구는 2020년 현재 37,819이다.
연혁
삼한시대에 마한의 건마국乾馬國으로 비정되기도 하며,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오차현烏次縣이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16)에 오아현烏兒縣으로 개칭, 보성군의 영현이 되었으며, 통일신라말 이곳 보림사에서 선종 9산문의 하나인 가지산문이 개창되었다.
고려초에 정안현定安縣으로 개칭하였다가 11세기 초 의종毅宗 때 장흥부로 승격되었다. 이때 수령현·회령현·장택현·탐진현을 영현으로 관할했다. 1265년(원종6)에 공예태후 임씨恭睿太后任氏의 고향이라 하여 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되었다가 1310년(충선왕2)에 장흥부로 강등되었다. 고려말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내륙으로 이전하기도 했다.
조선 개국초인 1392년(태조1)에 수령현의 중령산에 성을 쌓고 치소治所로 삼았으며, 1413년(태종13)에 장흥도호부로 승격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세조 때 진을 두고, 진도·강진·해남 등을 관할하였다. 명종대에 치소가 좁다 하여 옛 수령현 땅으로 옮겼다. 장흥의 별호는 정주·관산이었다. 1555년(명종10) 을묘왜변 때 왜구에 의해 부사 한온韓蘊이 전사하고, 부민이 큰 피해를 당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위대기魏大器·선거이宣居怡 등이 이순신 장군의 막하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1599년 권율權慄의 청에 의해 병영을 강진에서 장흥으로 이설했다가 1604년 다시 강진 구영舊營으로 옮겼다.
---「장흥군 개관」중에서
‘문림의향文林義鄕’은 장흥군의 브랜드이다. 장흥은 수많은 문인과 학자를 배출한 곳이다. 임진왜란을 비롯한 여러 차례 격난기 때마다 수많은 의병지도층 인물을 배출 한 곳이다. 장흥은 동학농민운동의 성지이다. 일제강점기에는 항일의병, 독립운동이 펼쳐졌던 고장이다. 장흥에서는 유일하게 안중근 사당을 모시고 있다.(여기에 실린 글은 『장흥군지』(장흥군,1990), 『장흥』(장흥군, 국립나주박물관,2019), 『장흥문화』(장흥문화원) 등의 자료에서 발췌하여 정리한 것이다.)
문림文林의 본산
장흥출신 인물 가운데 고려조에 문신으로 이름을 떨친 이는 위계정魏繼廷(1038~1107)이다. 그는 고려 문종 때 급제하여 수태위守太尉 문하시중상주국門下侍中上柱國에 올랐다. 그의 작품 〈관등시觀燈詩〉는 송대宋代 문신 심괄沈括의 『속필담』에 전하며, 해동의 명문으로 평가되는 〈하천안절표賀天安節表〉가『동문선』에 전한다. 이후 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止(1226~1292)는 몽고의 침입과 원나라의 내정간섭으로 이어지는 고려 후기의 격동기에 살았던 인물이다. 속명이 위원개魏元凱로 출가하기 전엔 1244(고종31) 문과에 장원하여 벼슬이 한림에 이르렀고 일본에 사신으로 건너가 국위를 선양하기도 했으며 문체가 원숙하고 뛰어난 당시 선비들이 탄복하였다 한다. 문집으로 『원감국사집圓鑑國師集』이 있으며, 『동문선』에도 시와 글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조선 세종때 문신인 김필金?(1426~1470)은 계유정란癸酉靖亂 이후 장흥에 내려와 사인정舍人亭을 짓고 은거하며 남효온과 교유하였다고 한다. 김괴金塊(1450~1482)는 문과에 급제한 뒤 사간원으로 활약하였고, 그의 아들 김광원金光遠은 조광조의 문인으로 유학의 진작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1521년 장흥에 유배된 신잠申潛(1491~1554)이 17년간의 유배 기간 중 장흥의 유생들을 교육하고, 유호인劉好仁(1502~1584)이 강학講學을 펼치면서 장흥이 문림文林의 본산으로서 길을 열게 되었다.
신잠의 문하에선 백광홍白光弘(1522~1556)을 비롯한 ‘기산팔문장岐山八文章’을 배출하였으며, 유호인劉好仁(1502~1584)의 문하에선 위덕의魏德毅, 정경달丁景達, 문희개文希凱, 정명렬丁鳴說, 이승, 위정훈魏廷勳, 위정렬魏廷烈, 위정철魏廷喆, 위정명魏廷鳴 등의 문사들이 배출되었다. 1675년 장흥에 유배된 민정중閔鼎重(1628~1692)이 유생들을 모아 강학하고, 지역의 문사들과 강회講會를 여는 등 장흥의 풍속 교화와 인재 배출에 영향력을 끼쳤다. 조선후기에는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1798~1879)이 장흥의 유생들에게 강학하였는데, 김한섭金漢燮·백영직白永直·위관식魏瓘植 등이 그의 문하이다.
이러한 학맥과 연유하여 기봉 백광홍이 출생한 기산 사자산 기슭의 ‘봉명재鳳鳴齋’에서는 백광홍白光弘과 백광훈白光勳 백광안白光顔 백광성白光城, 임분林賁,임회林?, 김윤金胤, 김공희金公喜 등 이른바 ‘기산 8문장’이 배출되었다. ‘기산팔문장’ 가운데 백광홍의 4형제가 포함되어 ‘1문 4문장一門四文章’으로 칭송되기도 한다. 백광훈은 최경창崔慶昌, 이달李達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도 유명한 시인이다. 2009년 안양면 기산마을에서는 ‘기산팔문장시가비’를 건립한 바 있다.
---「문림의향」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