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사람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떨쳐 일어나 맞서 싸웠던 올곧은 기질도 있다. 고려 때 원주로 쳐내려온 합단적을 맞아 영원산성에서 십여 차례 전투 끝에 몽고군을 몰아냈던 원충갑 장군이 있고, 고려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키며 평생 숨어 살았던 태종 이방원 스승 운곡 원천석도 있다. 단종이 폐위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생을 마감했던 생육신 관란 원호가 있고, 임진왜란 때 성안에서 백성과 한 덩어리가 되어 싸우다 전사한 목사 김제갑도 있다. 1907년 일제의 군대해산에 반발하여 의병을 일으켰던 의병장 민긍호가 있고,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지학순 주교와 무위당 장일순 선생도 있다. 대하소설 《토지》 작가 박경리 선생이 18년간 머무르며 4, 5부작을 마무리했던 단구동 옛집도 있다.
--- pp.17-18
길에는 연개소문도 있고 태실도 있다. 천주교 대안리 공소도 있고 700년 묵은 노송도 있다. 곳곳이 이야기로 넘쳐난다. 행기리와 사제리를 지나자 키 큰 풀이 바짓가랑이를 잡아챈다. 칡넝쿨이 발목을 잡는다. 옥수수는 수염을 달고 어른 흉내를 내고 있다. 봄꽃에 검은 나비, 노랑나비가 형형색색 날아들어 짝짓기하고 있다.
--- pp.31-32
정철이 지나간 간현에서 섬강 둑길과 태조 왕건 전설이 살아 숨 쉬는 건등산을 거쳐 문막 물굽이나루에 이르는 역사의 길이다. 인조반정의 돌격대장이었던 이괄도 있고, 왕건과 견훤이 한판 승부를 겨루었던 들판도 있다.
선조 계비(繼妃)였던 인목대비와 부친 김제남도 있고, 폐사지로 유명한 흥법사지도 있다
--- p.135
문막읍 안창리에는 김제남 신도비와 흥법사지가 있다. ‘욕바위’도 있고, 의병기념탑도 있다. 한 마을에 이렇게 많은 역사 유적과 인물이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안창리만 찬찬히 살펴보아도 하루 답사코스로 넉넉하다.
--- p.155
예로부터 문막은 물류 중심지요, 군사 요충지였다. 섬강과 남한강 따라 많은 물자와 사람이 오갔고, 기름진 땅과 드넓은 평야가 있어 삼국은 문막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였다. 백제, 고구려, 신라, 견훤, 궁예, 왕건이 차례차례 문막을 거쳐 갔고, 그때마다 민초들은 살아남기 위해 눈치를 살피며 줄을 서야 했다. 어떤 자는 죽어야 했고 살아남은 자도 언제 죽을지 몰랐다. 문막은 개경과 한양이 가까워 소문이 들끓었고, 문호가 열려있어 깨어있는 자가 많았다. ‘원주는 몰라도 문막은 안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 p.156
부론은 천년 사찰과 역사 인물의 고장이다. 폐사지로 유명한 법천사지와 거돈사지가 있고, 고려 공양왕이 머물렀던 손곡리도 있다. 단종이 유배길에 쉬어갔던 느티나무도 있고, 허균과 허초희의 스승 손곡 이달도 있다. 명·청 교체기에 억울하게 희생된 임경업이 있고, 유배 생활을 마치고 낙향하여 후학양성에 전념했던 태재 유방선도 있다. 평생 초야에 묻혀 학자로 살다 간 우담 정시한도 있다.
--- p.171
배재는 평범한 고개가 아니다. 배재는 왕위를 빼앗긴 단종과 천년 사직을 넘겨준 경순왕이 넘었던 길이요, 박해를 피해 숨어들었던 천주학쟁이가 목숨 걸고 넘었던 길이다
--- p.209
경순왕이 화백회의에서 나라를 넘겨주기로 결정하자, 죽방부인 박씨와 아들 마의태자, 딸 덕주 공주는 서라벌을 떠났다. 경순왕은 나라도 잃고 가족도 잃었다. 누군들 나라를 넘겨주고 싶었겠는가. 백성은 무슨 죄가 있는가? 지킬 힘도 없으면서 목소리만 높이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항전을 주장하는 자는 명
분만 앞세운다. 항복하지 않으면 백성만 죽어난다. 지도자가 판단을 그르치면 백성이 피눈물을 흘린다. 삶은 타이밍이요, 선택의 연속이다. 귀래에서 백운까지 경순왕을 떠올리며 상상의 나래를 펴며 걷는 일은 집필의 고통을 넘어선다.
--- p.212
지난 역사를 비판하기는 쉬워도 같은 일이 나한테 닥쳤다면 어떻게 했을까? 사육신처럼 멸문지화를 당하고 후세에 길이 남는 길을 택했을까, 아니면 한명회나 신숙주처럼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두고두고 욕먹는 길을 갔을까? 역사는 등장인물만 바뀔 뿐 계속 반복된다. EH 카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 p.215
신림에는 용소막성당이 있다. 횡성 풍수원과 원주 원동 성당에 이어 강원도에서 세 번째로 세워진(1915) 아름다운 성당이다. 신림에는 보부상이 등짐지고 넘었던 가리파재도 있고, 조선시대 둔전(屯田)이 있었던 금창리도 있다. 민족항일기에 문을 열었다가 80년 만에 문을 닫은 신림역도 있다.
--- p.237
호랑이가 어슬렁거리던 큰 고개가 가리파재였다. 봇짐장수와 등짐장수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보부상은 민초들이 먹고 사는 일상으로 들어가 생필품을 유통하며 시대의 격랑을 헤쳐나갔던 ‘생활 물류의 달인들’이었다. 왕조사나 궁궐사만 역사가 아니다. 보부상 역사도 우리의 역사다.
--- p.243
‘건강, 자랑, 호기심.’ 걷는 이유를 이렇게 분명하게 말하는 자는 처음이다. 길은 건강만 아니라 재미와 의미가 있어야 한다. 재미와 의미가 있으면 다시 찾게 된다.
--- p.256
궁예에게 석남사는 첫사랑 같은 곳이었다. 원주는 삼국통일의 주역이었던 왕건, 견훤, 궁예가 머무르며 인연을 맺었던 곳이다. 신라 경순왕과 고려 공양왕도 있으니 가히 역사의 고장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석남사터 발굴에 나섰던 전 원주시립박물관장 박종수는 “한국 중세는 초적 양길과 초적에 의탁했던 궁예로부터 비롯되었다”라고 했다.
--- p.2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