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일본의 개화는 착실하게 천천히 걷는 것이 아니라 온 힘을 다해 기합을 넣어 깡충깡충 뛰어가는 형국입니다. 개화의 모든 단계를 순서대로 밟아나갈 여유가 없어서 최대한 커다란 바늘로 듬성듬성 꿰매듯 지나가는 것입니다.
--- p.32
수천만이 될 만한 인간의 집합인 국가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그물눈으로 각 개인, 말하자면 각 원소가 연결되어있다. 법률, 경제, 습관, 도덕, …… 등의 여러 관계로 각 개인은 서로 관계하고 있으며, 또한 하나의 국가는 지방이나 직업, 계급 같은 소구분으로 나뉘어있다. 구체적인 국가는 대개 이러한데, 이런 상호관계의 그물눈을 모두 무시하고 인구만 남겨서 생각하는 방식이 집합론의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 p.41
현재 일본의 사회 상태가 어떤지를 살펴보면 현재 대단한 속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그에 동반되어 우리의 내면 역시 시시각각 대단한 기세로 변하고 있습니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계속 운전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때문에, 오늘날의 사회 상태와 20년 전, 30년 전의 사회 상태는 매우 그 분위기가 다릅니다. 다르므로 우리의 내면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미 내면이 달라지고 있다면 그것을 통일하는 형식이라는 것도 자연히 이와 조금은 어긋나야 합니다. 만약 그 형식을 약간이라도 변형시키지 않은 채 원래대로 고정해둔다면, 그 상태로 계속해서 그 형식 안에 끊임없이 변화할 우리 삶의 내용을 억지로 밀어 넣으려고 한다면, 결국 실패할 것임이 뻔히 눈에 보입니다.
--- p.78
이때 저는 처음으로 문학이 과연 무엇인지, 그 개념에 대해 자신이 직접 근본적으로 명확히 하지 않는 한, 스스로가 자신을 구제할 길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 완전히 ‘타인 본위’로 뿌리 없는 부평초처럼 정처 없이 여기저기를 떠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엉망이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인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지금 말하고 있는 ‘타인 본위’라는 것은, 예컨대 자신이 직접 자신의 술을 마시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술을 대신 마신 다른 사람의 품평을 듣고 설령 그것이 이치에 맞지 않더라도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야말로 ‘타인 흉내 내기’를 가리킵니다.
--- p.137
저는 이 ‘자기 본위’라는 말을 포착하게 된 후 무척 강해졌습니다. ‘그들은 뭐지’라며 그들에 대해서도 당당한 기개가 생겨났습니다. 그때까지 망연자실해 있던 제가 어디에 서서 어떤 길로 어떻게 가야 할지를 알게 해준, 제 길잡이가 되어준 것은, 실은 이 ‘자기 본위’라는 네 글자였습니다.
--- p.140-141
현재의 내 머리를 지배하고 미래의 나의 일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애석하게도 내 조상이 선사한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나와는 다른 인종이 바다 저편에서 가져다주었던 사상이다. 어느 날 나는 내 서재에 앉아 사방에 꽂혀있는 책장을 바라보았다. 그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금박으로 된 이름이 하나같이 서양어라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중략)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런 것들은 모두 외국인들이 작성한 사상을 파란색이나 빨간색 표지로 철해 완성시킨 책들에 불과했다. 단순히 그런 것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약간 부자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아 부유해진 것이 아니라 남의 집 양자로 들어가 낯선 이에게 얻게 된 재산이었다.
--- p.247
눈앞의 신박한 경물에 온통 현혹되어 일시적인 충동적 호기심으로 백 년의 관습을 버린다면, 이것은 나쁜 의미에서 미련이 없다는 의미다. 침착하게 결단하면 후회할 일이 없을 것이며 충동적으로 움직이면 역시 퇴보할 일이 생길 것이다. 일본인은 일시적인 충동으로 모든 풍속을 버린 후, 다시금 내버렸던 것들을 주워 모으는 중이다. 하이쿠는 버려졌다가 부활했다. 다도는 배척당했다가 부활했다.
--- p.357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메이지 40년이 유신의 위업을 대성한 시일이라고 생각해 자신이야말로 공신이든 모범이라고 한다면, 이른바 자만심과 광기를 겸비한 바보이자 병자일 것이다. 40년이 흐른 오늘까지, 모범이 되어야 마땅할 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 우리는 너희를 모범으로 삼을 정도로 자잘한 인간이 아니다.
--- p.375
공부하고 있습니까? 글은 쓰고 있습니까? 두 사람은 새로운 시대의 작가가 될 생각이겠지요? 나도 그런 생각으로 두 사람의 앞날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부디 훌륭한 사람이 되어주세요. 하지만 너무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소처럼 초연하게(넉살 좋게) 나아가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문단에 좀 더 기분 좋고 유쾌한 분위기가 유입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무턱대고 외래어에 납작 엎드리는 버릇은 버렸으면 합니다.
--- p.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