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재수학원은 매년 같은 난이도의 모의시험 문제를 출제하기 때문에 원점수의 비교에 의해 학년별 학력을 비교할 수 있다. 그 결론은 평균점수가 ‘1년에 1점 페이스’로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10년에 10점, 30년에 30점이다. 요즘의 대학생이 바보로 보이는 것은 결코 우리의 환각이 아니라 사실 대학생이 점점 바보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정원 감소’가 일어난 대학은 요컨대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대학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거기에는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을 할 수 없고 dangerous를 ‘단거러스’로 발음하고 ‘현재’를 ‘현제’로 쓰는 대학생이 여기저기에 무더기로 있게 된다(이미 있지만). 이런 ‘똥통 대학’에서는 당연히 ‘강의 붕괴’, ‘연습 붕괴’라는 사태가 발생한다. 강의 중에 강의실 안을 걸어 다니고 음료수를 마시고 음식을 먹고 화장을 하고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내고 게임을 하고 주의를 주는 교수를 째려보는 대학생이(이미 있지만) 각지의 ‘똥통 대학’에 발호하게 된다.
‘뭔가를 배우는’ 것은 ‘알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하는 방식’의 설명을 듣고 그것을 자기 나름대로 받아들여 주어진 과제에 응용해보고 잘 되지 않을 때는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를 지적받는 대화적, 쌍방향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행하는, 단지 그것뿐이다. 그러나 이 커뮤니케이션 훈련을 통해 아이들은, ‘설명을 들을 때는 입을 다물고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인다’, ‘나중에 생각해낼 수 있도록 (노트 등의 보조 수단을 사용해) 기억한다’, ‘질문은 정확하고 또 간결하게 한다’, ‘집중하고 있는 사람의 방해를 하지 않는다’ 등의 기본적인 매너를 자연스럽게 습득해가는 것이다. 그러나 초등학교 단계에서 ‘뭔가를 배우는’ 것을 포기하고, ‘뭔가를 배우는’ 방식 그 자체를 배우지 않고 어른이 된 아이는 성장한 후에도 ‘자신이 모르는 정보, 자신이 습득하지 못한 기술’을 제대로 습득할 수 없다. 대화적, 쌍방향적 커뮤니케이션의 방식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가정 붕괴’라든가 ‘가정 내 폭력’이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가족 구성원이 뿔뿔이 흩어져 있다는 인상을 받는데, 정말 가족은 해체되어 있는 것일까. 오히려 너무 밀착되어 있는 게 아닐까. 가족끼리 너무 밀착되어 ‘똑같은 의식ㆍ감각’을 너무 공유한 탓에 가정 안이 밀실이 되어 그곳이 ‘보통 사회의 보통 상식’으로부터 차단된, 의사소통이 무척 안 되는 농밀한 공간이 되어버린 것이 오히려 아이들이 일탈 행동을 하는 원인이 된 것이 아닐까.
‘학교에서는 예절이나 도덕 등에 대해 단단히 가르쳐주었으면 한다’는 부모의 말에서 아이가 읽어내는 것은 말의 표면이 아니라 말 속에 있는 ‘그런 성가신 일은 학교가 해, 우리는 바쁘니까’라는 ‘자못 깔보는’ 태도다. 특별히 부모들은 ‘예절이나 도덕’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 중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가르칠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억지로 떠맡기려는 것이다. 여기에는 교육기관에 대한 경외도 신뢰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부모가 경외나 신뢰를 느끼지 않는 교육기관이 그 아이를 효과적으로 사회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취직을 바라는 학생에게 내가 늘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기업의 지명도나 자본금과 ‘직장이 즐거운’ 것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이다. 책임감이 있고 근무고과가 공정하고 일을 잘하는 상사가 있고 유쾌한 동료가 있다면 아무리 단순 작업이라도 일은 즐겁다. 반대로 무책임하고 불공평하고 일을 못하는 상사와 느낌이 안 좋은 동료에게 둘러싸여 있다면 아무리 ‘창의적’이고 ‘첨단적’이며 ‘세련된’ 일을 해도 전혀 즐겁지 않다.
훌륭한 책은 우리를 낯선 풍경 속으로 데려간다. 그 풍경이 너무나 강렬해서 우리는 이미 자신에게 익숙한 세계에 이전처럼 잘 친숙해질 수가 없다. 그렇게 해서 더욱 낯선 세계로 헤치고 들어가지만 반드시 “아, 여기서부터는 더 나아갈 수 없다”는 지점에 이른다. 그리고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왔을 때 우리는 익숙해야 할 세계가 그때까지와는 다른 빛으로 빛나고 있는 것을 아는 것이다. 젊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이 끝없는 자기 해체와 자기 재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랑한 것을 미워하게 되고 한번은 미워한 것을 다시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우리는 조금씩 성장해간다. 그것을 위해서는 어렸을 때부터 책을 매개로 ‘이계(異界)’와 ‘타자’를 만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지식’에 대해 말하자면 내가 지론으로 말하는 것처럼 그런 것은 아무리 부지런히 모아도 아무런 보탬도 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성’이다. ‘지성’이라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 ‘매핑mapping’하는 능력이다.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를 말할 수 있고 필요한 데이터와 기술이 ‘어디에 있고 어떤 수순을 밟으면 손에 들어오는지’를 알고 있는 것이 ‘지성’의 작용이다. 학교라는 곳은 원래 그것만 가르쳐야 한다. 오래된 비유를 쓰자면 ‘물고기를 먹이는’ 것이 아니라 ‘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곳이다.
자신의 신체를 망가뜨리고 싶다는 욕구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마음 어딘가에 ‘지구를 파괴하고 싶다. 인류를 멸망시키고 싶다’는 어두운 욕구를 안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그런 상상을 하는 걸 아주 좋아한다. 우주에서 온 침략자가 인류를 몰살하러 오는 이야기도,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세계에 만연하는 이야기도, 혜성이 지구에 충돌하는 이야기도, 화산이 대도회에서 폭발하는 이야기도, 쓰나미가 도시 문명을 삼키는 이야기도, 죽은 자가 되살아나 사람들의 뇌수를 갉아먹는 이야기도, 열대우림이 없어지는 이야기도, 푸른 대지가 사막화하는 이야기도, 극지의 얼음이 녹아 전 세계가 수몰되는 이야기도, 오존 홀에서 자외선이 쏟아져 전 인류가 암으로 죽는 이야기도 우리는 아주 좋아한다. 그러므로 할리우드의 제작자들은 그런 영화에는 얼마든지 돈을 낸다. 아이들도 그런 유의 비극적인 결말을 아주 좋아한다. 극장판 [도라에몬]은 지구 멸망의 위기가 노비타와 도라에몬의 활약으로 위기일발의 순간에 회피된다는 이야기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이야기’가 아니라 ‘모두가 죽을 뻔하게 되는 이야기’인 것이다.
사람은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아마 ‘행복’의 정의가 좀 다를 것이다. 그때마다 항상 ‘죽기 직전에도 후회가 없는’ 상태, 그것을 나는 ‘행복’이라고 부르고 싶다. 행복한 사람이란, 쾌락은 ‘언젠가 끝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렇기에 ‘끝’까지의 모든 순간을 주의 깊고 신중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므로 “끝입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 그렇습니까, 예, 알았습니다”라는 식으로 마음 편히 대꾸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인 것이다. ‘끝’을 통고받아도 바동바동 “싫어, 싫어, 좀 더 살고, 좀 더 끝까지 쾌락을 누리고 싶어”라며 소란을 피우는 사람은 그 후 오래 살아도 결국 그다지 행복해질 수 없는 사람일 것이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행복할 뿐 아니라 타인을 행복하게 한다.
생태계에서는 그렇게 ‘뿔뿔이 흩어지는’ 것이 시스템 전체의 안정에 필요하다. 뛰어난 국제 감각을 가진 정치가나 외교관은 직관적으로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외교적인 위험에 대해서는 (예컨대 예상할 수 없는 행동을 보여주는 ‘불량’ 국가에 대해서는) 여러 국가가 동맹국에서부터 가상 적국까지 미묘한 그라데이션을 이루며 쭉 늘어서는 것이 리스크 분산에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스템이 살아남기 위한 지혜다.
살인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과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금지령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둘의 양립 불가능한 요청 사이에서 ‘분열되는 것’이 인간의 비극적 숙명이라는 점이다. 모순된 두 요청 사이에서 흔들리는 것은 기분 나쁘기 때문에 어느 쪽으로든 정리하여 깔끔하게 하고 싶다, 이야기를 단순하게 해주지 않으면 알 수 없게 된다고 그들은 말한다. 이는 ‘어린애’의 주장이다. ‘무장 국가’인가 ‘비무장 중립국가’인가의 양자택일밖에 없다는 것은 ‘어린애’의 논리다. 사물이 단순하지 않으면 기분 나쁘다는 것은 ‘어린애’의 생리다. ‘어른’은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누구든 롤 모델을 갖고 있다. 롤 모델은 자기 조형을 해나갈 때의 ‘주형(鑄型)’이다. “나는 갖고 있지 않아, 그런 건” 하고 반론하는 사람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사람의 경우는 “‘나는 갖고 있지 않아, 그런 건’ 하고 반론하는 사람”을 롤 모델로 자기 조형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스승으로부터 배우는 것은 ‘스승으로부터 배우는 방식’ 그 자체다. ‘나’가 먼저 확고하게 있고 그것이 가면이나 변장처럼 마음 내키는 대로 ‘롤 모델’이나 ‘스승’을 입거나 벗거나 할 수 있다면, 그런 것은 나의 근본적인 태도 결정이나 삶의 태도에 조금도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자기 조형’이라는 것은 그런 마음 편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공중에 띄우는 일이다. ‘나’를 공중에 매달아 올릴 터인 ‘발판’은 ‘나’의 발밑에는 없다. ‘나’의 발밑에 ‘발판’이 없는 이상 어딘가 ‘다른 데’서 빌려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른 데’에 ‘발판’을 빌리러 가야 하나 ‘발판’이 없으면 어디로도 발을 내디딜 수 없다. 그런 곡예에서의 ‘발판’이 ‘롤 모델’ 또는 ‘선생님’이라 불리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