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철학은 물음을 던지고 종교는 대답을 한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좀더 심오한 종교는 인간으로 하여금 계속 궁극적인 해답을 찾아가도록 물음을 던진다. 함석헌도 이를 인정한다. “물음으로 대답하고 대답으로 묻는 것이 참입니다. 하느님과의 대화는 그런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연현상을 인과론적 설명을 통해 해명하고 해결하려고 한다. 심지어 종교적 현상에 대해서도 과학적 설명을 통해서 밝혀보려고 애쓴다. 초월자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은 거꾸로 대답(까닭) 없이 던지는 질문 속에서 참을 발견하게 된다는 역설적 이치는 그리 간단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그럼에도 종교인은 어찌 그렇게 대답만 잘하는 것일까? 정녕 까닭-없이-존재하는 이를 찾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궁극적인 까닭에 대한 답변조차 논할 가치가 없다고 볼 수 있으리라.
---「1부. 종교 사유를 향하여 “종교의 외형과 참에 대한 물음”」중에서
신은 하나-임(님), 즉 하나이신 님이다. 하나이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 혹은 하느님이다. 모든 존재자는 그 하나에서 흘러나오고 그 하나로 다시 흘러 들어간다. 따라서 그는 하나라고 불러야 마땅하나 규정할 수없는 존재이기에 또한 님(임, Being; 任)이라는 지칭이 따라 붙어서 존재 그 자체이면서 동시에 무규정자에 대한 존칭으로 표상되어야 할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님을 님답게 만드는 것은 님 자신에 의해서 존립하는 것이 아니다. 그 존립을 가능하게 하는 타자인 민중이 있어야 한다. 님을 지시하고 그것이 존재 자체라는 것은 언어로서가 아니라 운동의 방향성을 늘 민중에게 두고 있기 때문이다. 민중의 운동성과 민중의 언어에서 존재 그 자체는 바로 임(Being) 혹은 존재의 있음(being)이 드러난다. 함석헌은 그것을 “하느님이 머리라면 그의 발은 민중에 와 있다. 거룩한 하느님의 발이 땅을 디디고 흙이 묻은 것, 그것이 곧 민중이다”라고 말함으로써 님과 민중의 필연적 관계를 적시하고 있다.
---「2부. 종교 구원을 향하여 “초월자에 대한 지향 의식과 존재론적 삶”」중에서
함석헌은 이와 같은 자기 성애적 종교관에서 탈피한다. 그는 자신을 “한 종교의 특수성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 보편주의에 선 사람이라는 것을 밝”힌다. 나아가 “꼭 그리스도교에만 진리가 있다든지 그런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종교의 특수성에 집착하는 종교적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종교들은 여전히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다. 이런 상황은 그나마 포용성을 강조하는 불교도 예외가 아니다. 엄격한 신앙 행위를 강조하면서 메카를 향해 하루에 다섯 번 기도를 올리는 이슬람교 역시 나르시시즘에 도취되어 있다. 종교의 개별성 혹은 특수성에 대한 존중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절대성만을 강조하는 게 문제이다. 나르시시즘은 자신의 절대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타자와의 관계성과 건전한 비교를 통해서 자신의 장단점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타자를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이 전부라는 착각에 빠지게 될 때 리비도는 분산, 분출하지 못하고 만다.
---「3부. 종교 시민을 향하여 “종교의 나르시시즘”」중에서
신의 감각이나 신의 나라는 공동의 장, 공통의 장, 공공의 장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기와 타자의 의사소통, 대화, 사랑 안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적인 신의 감각과 사적인 신의 나라를 빙자하여 타자의 감각과 감성을 매도하고 차이를 부정하려고 할 때에 더욱더 의사소통이 요구된다. 함석헌은 “모든 것이 다 그렇지만 종교까지도 부정되어야 종교다. 내용으로는 어떻게 고상한 진리를 알았다 하더라도 ‘이것은 절대 진리다’ 하는 순간 그것은 거짓이 돼버리는 것이요, 남이 보기엔 어떻게 열심 있는 신앙을 가졌다 하더라도 ‘내 믿음은 절대 정신〔正信〕이다’ 하는 순간, 곧 불신이 되어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자꾸 새로워질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종교의 가용성 편향을 극복하려면 사적 관점이 절대라는 아집을 버려야 한다. 자기와 타자가 완전하게 자기화(동일시)되어야 한다는 오만도 내려놔야 한다. 공적 감각의 대상으로서 신이 진정으로 공적 대상이 되려면 상호주관적으로 대화하면서 사적 감각 대상의 신으로 전락하려는 가능성을 막아야 한다. 그것이 곧 함석헌이 말한 종교의 자기 부정이다. 자신의 사적 종교조차도 부정하려는 의지를 가질 때 자신의 종교가 공적 종교, 공동체가 용인하는 종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 한국 사회는 자신의 사적 종교, 혹은 사적 체험의 종교, 사적 감각의 대상으로서 신에 대해서 공공성이라는 차원을 망각했기에 종교의 자기 부정은 더 시급하다.
---「4부. 인간의 절대적 자유를 위한 종교 “가용성 편향을 극복해야 할 종교”」중에서
파괴된 자기의식을 재생산하기 위한 틈새 시간을 꼭 어느 날로 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성스러운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느냐 혹은 자신의 개별적이고 주체적인 자신만의 시간을 그야말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존 라일은 서둘지 말라고 말하면서, 우리 현대인들에게 너무 바쁘게 살지 말라고 충고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부분 노동자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연 자신의 개인적이고 주체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하고 반문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지하철에서든, 버스에서든, 집에서든, 식사시간에든 간에 반드시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이성의 자기실현이고 종교인에게는 성스러운 시간이다. 종교인은 서둘러서 미사, 예배, 법회 등에 참예하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미리 준비하면서, 그 준비하는 것 자체가 이미 자신의 내면을 고요히 하면서 신과 만나고 있는 것이니 몸과 마음의 감각을 신에게 향하는 신앙 감성의 여유로움부터 길러야 한다. (…)
자신을 성찰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내려놓는 시간은 결국 자신의 내면에 있는 초월적 존재를 관조하기 위한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니 만일 분주한 삶의 날, 노동하는 날과 구분이 되는 날이 없다면 초월적 존재에 대한 사유는 사라지고 말 것이 아니겠는가. 쉼을 의례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재생하고 재현하는 것도 바로 망각의 동물인 인간이 구별된 시간을 통하여 자신을 돌아보고 타자와의 관계를 재설정하면서 궁극적 존재인 초월자 앞에 머리를 숙이기 위해서다.
---「덧붙임글 3: “세기의 편견으로부터 해방(구원): 함석헌과 사회적 영성”」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