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말이 없던 이대길이 긴 담뱃대를 다시 입에 문다. 담배를 피우면서 잠시 침묵이 흐른다. 이대길이 인철의 얘기를 꺼낸다. 이대길은 장만수를 통해서 독립자금을 전달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인철이 소식이 더없이 궁금하다. “만주 용정에 가면 우리 인철이 갸를 만날 수 있을 걸세. 어디든 수소문을 해서라도 갸를 찾아야 하네. 자네가 애를 좀 써 줘야겠네. 내가 짐작하건대 대종교 모임을 수소문해 보면 알 수 있을 걸세. 지가 어디 갔겠는가? 쪼깨라도 구례 사람들과 아는 사람들 찾아갔겠지? 내 짐작에는 그런디….” 힘이 빠진 말투다.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몰라서 지레짐작으로 하는 말인 것을 안다. 이대길은 대종교 모임에 인철이가 관련되어 있으면 하는 바람에서 그냥 추측으로 하는 소리다. 그쪽에 모인 사람들이 고향 사람들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기에 그쪽을 찾아갔으리라는 바람이어서 하는 말이다. “독립운동을 하는 나철, 이기 등이 구국제민救國濟民의 기치 아래 대종교 단체를 중심으로 많은 조선 사람들이 그곳으로 모인다는 소문이 있으니, 그곳을 수소문해 보면 찾을 수 있을 걸세. 자네도 알겠지만, 지천리 왕석보 어른의 제자인 나철을 중심으로 대종교를 만들었다는 얘기가 들리고, 대종교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3·1 만세운동 후에는 일본 놈들의 탄압을 피해 만주에 모여서 큰일을 꾸미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네. 쬐끔이라도 지가 발붙일 곳을 찾아갔을 것으로 짐작은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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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철은 수소문 끝에 독립군들이 훈련하는 곳을 찾아가 독립군에 합류하였다. 많은 청년들과 함께 일본군과 싸우기 위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중국 땅은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수많은 독립군들이 총탄에 맞아 쓰러져 갔다. 일본 놈들을 한 놈이라도 더 죽이기 위해 온몸을 바쳤다. 인철은 전투를 하다가 총알이 어깨를 관통하는 바람에 목숨은 건졌지만, 몸이 크게 상하였다. 다친 몸을 이끌고 독립군들을 계속 따라다니기는 무리였다. 총상 부위를 치료받기 위하여 조선 동포들이 사는 지역으로 후송되었다. 어느 지역인지도 모른 채 조선인들이 숨겨 주고, 총상 부위를 치료해 주었다. 날이 갈수록 부상 부위는 호전되었다. 그야말로 은밀하게 인철을 치료해 주는 이곳은 어디란 말인가? 어떤 사람들이란 말인가?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기라도 하면 그들의 목숨도 온전치 못할 텐데…. 치료를 받으면서도 불안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지역 사람들에게 끼칠 폐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걱정으로 가득했다. 그들은 인철에게 사랑이 넘치도록 호의를 베풀었다. 인철이 와 있는 곳은 북간도 지역이었다. 김약연 목사와 명동교회, 캐나다 선교사들이 세운 제창병원과 교회 사람들이 은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차차 알게 되었다. 기독교 교인들이 목숨도 아끼지 않고 부상병을 치료해 주는 일에 솔선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물망처럼 점조직으로 연결되어 독립군들과 은밀하게 교류하면서, 지원을 해 주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 지역 사람 모두가 총칼만 들지 않았지, 얼굴도 드러내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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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길이 아들이 몇 살이던가?” 이대길이 김 서방에게 묻는다. “올해 열세 살이 된다고 합니다.” “벌써 그렇게 됐나? 세월이 참 빠르구먼…. 이번 시제에 맞춰서 오라고 기별을 하게.” “예, 대감마님.” 당몰 외가에서 자라고 있는 조카 인석을 시제에 참여시키라는 얘기다. 분가한 동생 이명길이 죽은 지 십 년이 흘렀다. 인석이 세 살 때 일이다. 그동안 인석은 당몰 외삼촌 집에서 십 년을 지내 온 것이다. 그동안 이대길은 동생의 전답을 대신 관리해 왔다. 인석이 장차 성장해서 결혼을 해 살림을 날 때쯤이면 그 몫을 챙겨 주려고 한다. 인석이 이제 다 컸으니 큰집에 와서 일도 배우고, 또 결혼도 하려면 데려와 키워야만 한다. 인석이 어머니도 평생을 청상과부로 살 수 없는 일이어서, 인석을 친정에 맡기고 재혼을 한 상태다. 그러니 인석이 혼자서 외가에 계속 눌러앉아 있기는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이씨 성을 가진 인석을 유씨 외가에서 계속 지내게 할 수는 없다. 인석이 어느 정도 크면, 큰집으로 데려오려고 애초부터 작정한 일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데려와 집안의 일원이 되는 일이 급하기만 하다. 금번 시제에 집안 어른들께도 문안을 드리고, 큰집에서 계속 지내게 할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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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절골댁이 통곡을 한다. 민정도 옆에서 눈물을 흘린다. 난동댁과 경자도 눈물을 훔친다. 상주는 민정이지만 어린 민정과 함께 곡을 하는 사람은 절골댁이다. 열병으로 앓아누웠던 대산리댁이 이렇게 빨리 목숨을 놓아 버릴 줄은 몰랐다. 갑작스런 일이다. 허망하기만 할 따름이다. 시집와서 좋은 세상 한번 살아 보지 못한 동서가 불쌍하기만 하다. 절골댁은 자신의 일처럼 서럽다. 학길이 서방님은 사업을 한답시고, 사업 밑천으로 전답도 모두 팔아치우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서방님만 오매불망 기다리더니…. 이씨 문중에 무슨 사람 잡아가는 귀신이라도 씌었는지…. 이대길 사 형제 모두 결혼을 하였지만 둘째 성길, 셋째 명길까지 작은댁 서방님들이 둘이나 죽었다. 작은댁 서방님들이 죽고 난 후에 동서들도 이씨 집안을 모두 떠나가 버렸다. 이제 한 명 남아 있던 동서 대산리댁조차 죽어 버렸으니 얼마나 원통한 일인가? 집안 대소사를 치를 때마다 동서끼리 그나마 서로 의지가 되어 왔는데… 민정과 한없이 목 놓아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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