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랑을 위하여 꿈(그림)을 부풀게 했고, 차고 뜨겁게 부딪쳐 얻은 다양한 사랑의 감상은 내 꿈, 작품 생활을 또한 키워 주기도 했어요.
이 꿈과 사랑이 불안한 평행선을 무궤도하게 달리기도 했지만, 거기에 가장 안전한 다리를 걸어 준 것이 모정이었지요. 세상에 흔한 게 자식이고 모정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긴 세월을 살고 보니 내 가슴에 굽이굽이 맺혔던 절망을 달래 주고, 폭풍의 언덕을 넘게 한 용기를 준 것은 오직 모정이었어요.
나는 그 세 가지 원동력으로, 달리 종교나 형식적인 믿음을 가질 필요 없이, 내 나름으로 악인이 되지 않고 인생을 운영해 온 셈이지요.
--- p.21 「천경자, 그 슬픈 전설의 91페이지」 중에서
천경자: 아버지에게 갓을 씌우고 동생을 옆에 오둑하니 쪼그려 앉혀 짚신 파는 영감을 그린 〈노점〉을 선전에 처음으로 출품했으나 낙선하고 기숙사에서 홀로 울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이듬해 초 ‘입선 축하합니다’라는 엽서가 경성(서울)에 있는 표구소에서 날아왔어요. 반신불수 외조부를 모델로 한 〈조부상〉이 22회 선전에 입선한 것이에요. 여름방학 때 고흥에서 한 데생을 겨울날 외풍이 심한 하숙집 2층에서 완성했는데, 아교가 섞인 채색 물감이 금방 애려 버려 할 수 없이 전구 옆에 아교가 든 병을 매달아 힘들게 그린 작품이 화가의 길을 열어 준 것이지요.
비로소 저는 아버지에게 말 많은 고향 사람들 구설을 면하게 해드리고, 3학년 여름방학 때는 당당한 기분으로 귀성할 수가 있었으나 우리 집은 자꾸만 기울고 있었지요.
기자: 천 선생은 아버지가 도박 빚으로 가산을 탕진해 학비조차 잘 대주지 않자 어머니가 패물을 팔아 몰래 보내 준 학비로 어렵사리 학교를 다녔지만, 자주색 코트에 잿빛 모자를 쓴 차림새로 동경의 청춘, 동경의 낭만에 젖어 생동하는 생활을 하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그해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했습니다.
--- p.37~38 「인생을 축제처럼 살다 간 축복받은 화가」 중에서
주인 남자는 상자 열쇠를 끌러 값진 흑질백장을 꺼내 그리기 쉽게 뱀 목을 쥐어 주는 등 여간 친절하지 않았어요. 저주 서린 하얀 배때기에 시꺼먼 비늘의 등허리, 뭔지 죄 많이 짓고 죽은 흑천공작의 화신 같은 느낌이 드는데, 이를테면 귀족 뱀이었던 것이지요.
제가 뱀에 대해 오래도록 궁금하고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그 눈이었어요. 예로부터 독한 여자나 음모술수를 일삼는 악인의 눈을 뱀눈에 비유했기에 말이에요. 어린 시절, 동경에서 돌아와 뱀을 보았고 돌질을 한 적이 있지만 한 번도 뱀눈을 직시해 본 일이 없었거든요.
“아린아, 뱀눈이 똑 붕어 눈깔 같다잉.”
“아믐요, 누님.”
“아이말다, 개구리 새끼 한 마리 있으면 좋겠다잉. 어디 묵는가 보게….”
“아니요. 갇혀서 한번 상자 속에 들어가면 먹지 않습니다. 독한 것이어서 3년을 살아도 절대 먹지 않아요.”
주인 남자가 말해 주었어요.
--- p.50~51 「인생을 축제처럼 살다 간 축복받은 화가」 중에서
오래전부터 저는 강한 심적 충격 때문에 시력에도 금이 가기 시작하고, 신경쇠약 때문에 2층에서 그림을 그리다가도 일시적인 환상 착란으로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을 때가 있었지만, 다행히 의지로 극복해서 환상만으로 그치곤 했어요.
그럴 즈음, 다행인지 어려운 아프리카 스케치 여행의 억지 꿈이 이뤄져 저는 주기적으로 닥쳐오는 환상의 죽음 속에서 구출되었어요. 그 참에 인도네시아의 발리섬,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 케냐의 킬리만자로와 나이로비, 우간다의 캄팔라와 엔테베,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의 킨샤사,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와 라바트와 사하라, 이집트의 카이로와 룩소르 등을 3개월간 돌면서 기차게 신나는 스케치 여행을 했네요.
--- p.93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 중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영상)의 비극의 무대였던 베로나는 지금도 로미오가 “연하게 저 창문을 통해 비쳐 오는 빛은 무엇인가? 그은 동이다. 그리고 줄리엣은 태양이다. 그것은 나의 사랑. 오, 그것은 나의 사랑” 했던 줄리엣의 집 발코니(영상)가 그대로 남아 있어 여행자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있어요.
날이 새도 안개, 대낮에도 안개, 안개에 덮인 베네치아에서 저는 영화 〈여정〉에서 소개된 산마르코 사원 앞 광장(영상)으로 가는 정기선에 올랐어요. 호젓한 산마르코 광장에 우뚝 서서 저는 서글픈 여정에 잠겼어요.
--- p.132 「경쾌하게 펼쳐지는 풍광-이탈리아」 중에서
파리에서 생활하며 내내 내 생활감정을 지배했던 비극, 사흘 동안 죽고 싶은 절망, 이틀 동안 살고 싶은 희망, 그와 같은 기분이 교차하는 나날의 고독한 생활이었어요.
얼마 후엔 추억이 되어 버릴 몽파르나스 거리, 세계의 젊은 멋쟁이들이 모여들어 거니는 셍미쉘 거리, 좋은 영화만 상영하는 극장들…. 회색 하늘에 뽀얗게 솟은 에펠탑, 그동안 이렇다 할 멋진 친구 하나 없었지만 그렇게도 분위기 좋았던 파리를 떠나려니 엷은 애수가 가슴을 졸이게 했어요.
--- p.145 「경쾌하게 펼쳐지는 풍광-이탈리아」 중에서
기자: 천경자 선생이 월남전 종군 화가였다는 것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화가는 이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으며, 2006년 새로 간추린 드로잉 중에 베트남전 스케치들(영상)이 꽤 많이 눈에 띄어요.
천 선생은 1972년 6월 말 20일간의 일정으로 군용기를 타고 사이공에 도착했어요. B지구인 맹호부대에 배속된 천 선생은 동료 화가 김기창·박영선·김원·임직순 등과 함께 사령부가 있는 퀴논에 숙소를 정하고, 작전 현장에 참여하기 위해 입대해 군복으로 갈아입었어요.
천경자: 매일 헬리콥터를 타고 전방에 나가서 고되긴 했지만 즐거운 스케치들을 많이 했어요. 스케치를 하면서 전차를 따라가는 스릴이 말할 수 없이 좋았고, 전진에 휘날리는 열사에 핀 빼방쉐라는 진분홍꽃이 유정하기만 했어요. 또 우리를 위해 더위에 방탄조끼까지 걸친 사병들이 일부러 모델이 되어 주어 움직이지 않고 오래 포즈를 취해 주기도 했어요.
--- p.168 「베트남 전장을 누빈 홍일점 종군 화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