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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엄쉬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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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8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120쪽 | 180g | 126*205*9mm
ISBN13 9791158965211
ISBN10 1158965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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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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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기도 끝에
채운다

빈듯하던
꽉 채운 물항아리가
비로소 텅 비어
충만하다

들릴락 말락 신의 음성

손에 쥔 먼지도
놓고 가라는 말씀
--- 「비움」 중에서


한낮 마당에
없던 그림자가 얼씬거린다
해고당했다는 말 없었지만
뜨끔하다

일없이 신문을 뒤적거리다가
“일자리 해결”
“코로나 쉼쉼 경영”
쉼쉼 백신 처방에
밑줄 긋는다

4일 근무에 3일 쉰다는
3일 일하고 4일 논다는 말 안심이다
코로나 쉼쉼,
월화수목 뼈 빠지고 금토일 또 쌔 빠진
네겐 특별휴가 아니겠냐

네 그림자의 양어깨가 수평을 잃었구나
그래 쉼쉼 아니
쉬엄쉬엄,
--- 「쉬엄쉬엄」 중에서


진도 맹골죽도 갯바위 돌미역은 낫 자국이 있다 미역귀에서는 거친 파도 소리가 난다

따개비처럼 바위에 붙어살았다 파도인 양 바람인 양 평생 갯바위와 한 몸이었다

물고기처럼 바닷물에 젖어 있는 김서운 할매네 돌담 아래 세워둔 김발, 핏빛 노을이 물들고 있다

맹골죽도 사람들 날마다 미역국을 끓이는 건, 살아남은 그날 그날이 생일이기 때문이다
--- 「미역국」 중에서


코로나19 진단검사 후 날짜가 잡혔다 보호자는 한 명, 간호는 아들에게 맡기고 네온사인 화려한 모텔에 들었다 사회적 거리? 침대와 침대 사이가 멀다

남편 퇴원 후,
양지바른 101동 대추나무와 목련 사이가
사회적 거리인 걸 알겠다
백목련 마른기침에
대추나무 잔가시 움츠리고
서로 밟지 않을 거리에서
비바람에 흔들려도 팔 닿지 않을

음압 격리병실처럼
침묵은 생존이다
서로 찌르지 않고 찔리지 않아야
저 대추 곱게 붉어질 것이다

나와 남편
딱 그만큼의 거리로 떨어져 익어왔음을 알겠다

침대와 침대가 너무 멀다
--- 「사회적 거리」 중에서


찌그러진 것은 나이테다 부글부글 밥을 끓이며 보글보글 찌개를 끓이며 그렇게 나이를 먹었다

하루에도 세 번씩 달아올랐다 탄내 나는 밥보다 속이 더 새까맣던 시절, 세상은 언제나 설익었다

찬장 아래 쥐구멍에 기어들고만 싶었다 연중행사로나 끓이던 삼계탕 속 닭인 듯, 멀쩡한 날개로 날지 못했다

뚜껑부터 들썩거리던 일용할 밥이 되고 국이 되던 찌그러진 양은냄비, 반백 년 버리지 못했다 눌어붙은 이력 지워지지 않았다

양은냄비처럼 찌그러져 쉬 끓고 금세 식던 시절이 있었다 엿이나 바꿔 먹을 걸, 쓸데없이 귀는 밝고 눈 어둔 시절이었다
--- 「양은냄비」 중에서


내 안의 내가 폭발한다

성경 속 갈등 꾹꾹 눌러 열두어 가마
피 끓는 공적 예닐곱 권
가슴에 박힌 상처가 너무 많아
주엽나무처럼 가시를 품고 산다

소리 없이 박힌 못
밤새도록 뽑아내고 나니 피눈물이 두 됫박
후들후들 들숨 날숨 가빠진다

왼뺨과 오른뺨을 채반에 올려놓고 바짝 말린다
가시가 돋는다

가시는 뾰족해지고
용서는 작아진다

갈기갈기 바람을 찢는 내게
폭발한 내 안의 내게
밑줄 그어놓은 말씀 한 구절 담아 보낸다
옆구리 통증도 끼워 보낸다

“반품 사절”
--- 「반품 사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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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다던가? 가는 세월은, 시쳇말로 유수와 같다는 세월은 문학의 대표적 소재다. 어쩌랴, 세월이 가면 사람도 따라가야 하건만, 몸이 가면 마음도 따라가야 하건만, 세월 따로 몸 따로요 몸 따로 마음 따로니 멀미가 날밖에. 그러니 당연히 야속한 세월이나 탓하는 수밖에. 멀미라는 게 두 물체 사이의 속도 차이 아니랴, 간극 아니랴. “흐릿흐릿 흔들리며 노인이 간다/신발이 끌고 간다”(「신발」). 신발이 세월을 잊지 못하는 노인을 끌고 추억 속으로, 길 속으로 간다. 천관녀를 찾아간 김유신의 말처럼 간다. 그렇게 이소애 시인의 시는 간다. “마음속 마른 잎맥의 고요를 꺾”(「붉다」)으며 간다. 이 시집 『쉬엄쉬엄』은 노을 따라 붉을 줄 아는, 열심히 길을 걸어온 자만이 체득할 수 있는 인생에 대한 작은 고찰이자 혜안이다.
- 안성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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