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는 결혼을 계기로 일본 국적을 취득했는데, 이제 와 재일 교포라는 사실이 들통나면 곤란하다며 그 사실을 철저히 숨기고 살고 있었다. 또 준코 언니와 고타도 오빠가 한국인으로 보이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평소에도 오빠네 가족은 ‘문이애(文梨愛, 일본식 발음으로 분리에)’라는 본명을 쓰는 리에와 딱히 친하게 지낼 생각은 없어 보였다. 어머니가 생전에 “네가 한국 이름을 쓰니까 입장이 좀 난처한가 봐. 오빠 상황도 이해해줘”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오빠뿐만이 아니다. 아버지 자신도 ‘후미야마 도쿠노부[文山?允]’라는 일본 이름으로 살아왔다.
집안에서는 한국 음식과 한국 방식을 고집하는 아버지였지만, 밖으로 나가면 일본인인 척했다. 숨기고 사는 편이 거북한 상황을 회피할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리에는 아버지의 그런 모순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대학에 다닐 때도 사회인이 된 지금도 ‘분리에’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갈 때 오빠가 일본 국적을 취득하는 것에 반발이라도 하듯 ‘후미야마’라는 성을 ‘분’으로 되돌렸다. 그때 어머니는 반대했지만,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한국식 한자 읽기로 ‘문이애’라고 하지 않고, ‘분리에’라고 일본식으로 부르고 있다. 결국 자신도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처지다.
--- p.21
드디어 식민지에서 해방되어 이제 자유롭게 우리말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내 기분을 읽었는지 안철수는 “잘 들어라” 하며 한 명씩 눈을 맞추고 다시 한번 얘기했다.
“여기는 조선이 아니다. 일본이다. 사람들 대부분이 일본인이야. 오늘은 상대가 약해서 내가 어떻게 제압했지만 나는 늘 조선인이란 걸 감추고 있다. 불필요한 싸움을 하고 싶지 않아서지. 아까 그 자식의 볼이 푹 꺼진 얼굴을 생각해봐. 자기 처지 때문에 누군가에게 분풀이라도 하고 싶어 하던 그 얼굴을.”
다리를 절면서 걸어가던 남자의 뒷모습이 떠올라 기분이 씁쓸했다.
“앞으로는 일본인들 틈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러니까 각자 이름을 부를 때도 일본식으로 바꿔 불러라. 박영옥이, 너는 박朴씨니까 기노시타[木下], 김태룡이, 너는 김金씨니까 가네다[金田], 끝으로 문덕윤, 너 문文씨니까 후미야마[文山]다. 알겠느냐?”
조선인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가고 싶었는데 도망쳐 왔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거기 그대로 있었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일제강점기 시절처럼 일본식 이름을 또다시 써야 한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문덕윤文?允도 후미야마 도쿠노부[文山?允]도 어차피 가짜 이름인데, 일본식으로 부른다고 큰 차이가 있을까.
--- p.83-84
3년에 걸친 한국전쟁이 끝났다.
일본은 한국전쟁 특수로 경기가 좋아졌지만 수많은 동포의 생활은 여전히 힘겨웠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 내에서도 남과 북, 양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뉘어 증오만 더해갔다. 날품팔이 현장에서도 동기들끼리 남북으로 나뉘어 말싸움을 하다가 폭행으로까지 번진 것을 나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한국전쟁에서는 군인뿐만 아니라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의용군으로 참가한 도요타 형님도 전사했다. 우리가 편지를 부탁한 안철수는 일본으로 돌아왔다고 하는데 우리들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아 편지가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도, 가족들의 소식도 알 수 없었다.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공화조약을 거쳐 GHQ 점령 상태에서 벗어났다. 그것을 계기로 동인은 제일호텔을 그만두고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와세다대학에 다니기 시작했다.
나도 동인에게 자극을 받아 호세이대학 야간학부 시험을 치르고 간신히 입학했다. 진하는 공부는 질색이라며 대학에는 가지 않았지만, 신바시 여관 주인이 새롭게 시작한 파친코 가게 일을 돕기 시작했다.
--- p.130
태양이 이글거리는 뜨거운 여름날인데도 흰 긴팔 셔츠에 넥타이까지 매고 나오니 온몸에서 엄청난 땀이 쏟아졌다. 나는 오이마치 센다이자카 언덕을 내려가 용숙의 집으로 갔다. 오늘은 용숙네 집 식사 자리에 초대받았다.
에틸렌의 달콤한 냄새가 풍기는 공장 2층, 주거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라갔다.
한복을 입은 용숙의 언니인 용순이 마중을 나와 자기소개를 하더니 “용숙이보다 열두 살이나 많다고 들었는데 앳되어 보이네요” 했다. 그리고 현관에서 거실로 안내해주었다. 용순은 용숙과 많이 닮았는데, 용순이 훨씬 체구가 풍만했다.
다다미 여덟 장 정도 되는 거실에는 가족 전원이 모여 있었다. 여자들은 모두 한복을 입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용숙이 가장 화려했다. 청초하고 아름다웠다. 나는 가슴이 계속 두근거렸다.
용숙의 부모님, 용해, 용해의 아내, 용해의 두 아들, 용숙, 그리고 용순과 그 남편과 어린 딸까지 총 열 명이었다. 스무 개의 눈동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내 내장 안까지 들춰보며 평가를 하고 있는 것 같아 안절부절못했다.
--- p.167-168
용숙의 친정을 나오자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코트의 앞섬을 여미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차가운 빗방울이 얼굴로 떨어졌다
두꺼운 구름 저편을 향해 “어머니” 하고 소리쳤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미심쩍은 얼굴로 나를 노려봤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소리쳤다.
“제가 부모가 됩니다!”
“피가 섞인 자식이 태어납니다!”
결혼하고 아기가 생기니 조국의 가족과 점점 더 단절되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아이를 통해 우리 어머니, 아버지와도 새로운 혈연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리고 용숙 일가와도 더 강한 유대감이 생길 것이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마음이 솟아올라 추위를 느낄 수 없었다. 나는 뛰기 시작했다. 아파트까지 단숨에 달렸다. 그사이 딱히 의미도 없는 말들을 계속 외쳐댔다.
--- p.194-195
총련과 공동대회를 개최한 우리 그룹은 민단 집행부와 그 당시 중앙정보부 산하기관처럼 활동하던 대사관으로부터 ‘총련과 손을 잡은 이적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규탄받았다.
먼저 민단으로부터 산하단체를 취하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어서 우리 활동에 같이 참가한 부인회 회원들 중 임원이었던 경귀가 뉴재팬호텔로 불려가 영사에게 심한 추궁을 당했다. 여성을 표적으로 삼는 것이 실로 역겨운 처사였다. 그런데도 경귀는 끝까지 “이적행위라는 판단에 동의할 수 없다”며 반론했다고 하니 역시나 동인의 아내, 장하다 싶었다.
우리는 역경에 처하자 역으로 결속력이 강화되어 더 자주 모였다. 그러자 우리 활동에 자극을 받은 민단 동경 본부와 가나가와현 본부에 소속된 반주류파 단원들도 민단을 탈퇴하고 한청과 함께 ‘민족통일협의회’라는 단체를 설립했다.
8월 말, 아침저녁으로 더위가 좀 식었을 무렵이었다. 그날 나는 한청 사무소로 향하고 있었다. 건물에는 1층에 동경 본부, 2층에 부인회, 3층에 한청 사무소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민족통일협의회 동지들과 뜻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있었다. 그곳은 반주류파의 거점이기도 했다.
--- p.241-242
납치 후 김대중 선생의 생명의 위협을 직감한 민족통일협의회 회원을 중심으로 ‘김대중 선생 구출대책위원회’를 결성했는데 나는 거기도 참석하지 못했다. 종명이가 계속되는 고열로 집중치료실에서 나오지 못해 병원에 내내 붙어 지내야 했다.
그로부터 닷새 후인 8월 13일 밤 10시 30분에 김대중 선생이 한국 서울에 있는 자택 근처에서 풀려났다. 일단 목숨을 건졌다는 사실에 나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김대중 선생은 호텔에서 납치된 후 눈을 가린 채 구속되어, 차와 배에 실려 다녔다고 한다. 범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검문을 한 번도 받지 않고 국경을 넘어가다니, 이번 일은 한국 정부가 얽혀 있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박정희 정권은 관여를 부인했다. 간신히 풀려났지만 김대중 선생은 한국 정부가 자택 감금한 상태로 다시 일본에 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도 민족통일협의회 동지들이 중심이 되어, 김대중 선생을 의장으로 하는 일본 측 ‘한국민주회복 통일촉진 국민회의’, 즉 한민통을 결성하기로 했다.
한민통은 앞으로도 권력에 굴복하지 않으며 박정희 정권 타도와 한국 민주화 및 재일 동포의 생활 및 권익 향상을 위해 민단을 민주화하는 것을 그 이념으로 삼았다. 그리고 김대중 선생이 한국에서 더 이상 목숨을 위협받지 않도록 적극적인 활동을 펼쳐나가기로 약속했다.
일련의 한민통의 움직임과 함께 13일에 발기대회가 열린다는 얘기를 진하를 통해 들었다. 나는 그 자리에 꼭 참석하고 싶었다. 다행히도 종명이의 상태가 좋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용숙에게 둘러댈 거리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회사에 급히 처리할 일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대회가 열리는 장소로 향했다.
--- p.274
대한항공 비행기가 착륙한 곳은 부산 공항이었다.
한국어가 오가는 것을 보니 이곳은 일본이 아니라 조국이다. 그런데 가슴이 뛰지도 않았고 낯익은 분위기도 없었다. 이제껏 나는 부산에는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다. 아니 한국에 살 때 고향인 삼천포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다.
공항은 살벌한 공기가 지배하고 있었다. 입국 심사를 담당하는 직원은 태도가 거만한 데다 질문도 많아서 불쾌했다. 세관에서는 짐을 구석구석 샅샅이 조사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무리 대사관 직원이 여권을 주었다 한들 신분을 속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혹시나 체포가 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공항 로비를 나오자 군복은 입은 군인들이 정렬을 하고 내 앞을 지나갔다. 삼엄한 분위기에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도 어두워 보여 나도 침통한 기분이 되었다.
“상주 형님!”
뒤를 돌아보자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한 피부색이 까무잡잡한 남자가 서 있었다. 전화를 걸어 온 아랫동생 홍주다. 내가 밀항했을 때 홍주는 중학생이었다.
나는 홍주를 끌어안았다. 목소리도 눈물도 나오지 않았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통곡하고 있었다.
--- p.298-2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