必
그러나, 저녁이 오고 있다 그러나 저녁이 오고 있다라는 문장은 저녁 바깥에 있다 그러나 저녁이 오고 있다라는 문장을 쓰는 저녁 바깥의 저녁은 이제 막 저녁이 되려 한다 아직 저녁은 오지 않았는데 그러나 저녁은 저녁 바깥으로부터 오고 나팔꽃은 서둘러 지려 하고 그러나 저녁이 오고 있다라는 문장을 쓰는 저녁 바깥의 저녁은 온통 저무는 중이다 나팔꽃은 낮과 밤을 언제부터 구분하기 시작했을까 그러나 나팔꽃은 저녁 바깥의 저녁에서 꽃잎을 오므리고 가시거미는 제가 뱉어 놓은 그물 속에서 깨어나려 하고 그러나 가시거미가 깁고 있는 저녁은 저녁이 오기 오래전부터 부서져 내린다 그러나 그런 저녁이 오고 있다라고 쓰는 저녁 바깥의 저녁 거기 당신 오랜만이군요 그러나 누구인가 당신은 왜 저녁 속으로 돌아가지 못하는가 저녁이 오고 있는데 저렇게 오고 있는데 그러나 저녁이 오고 있다라는 문장을 쓰고 있는 저녁의 바깥에서 내내 서성이기만 하는 당신 잘못 물들인 색화지처럼 저녁의 바깥으로 저며 들고 있는 저녁 그러나 나는 왜 이 문장을 기어이 완성하려 하는가 그러나 저기 분명 저녁이 오고 있는데 저녁이 오고 있다라고 쓰고 다시 고쳐 쓰는 저녁의 바깥은 아무런 뜻도 없이 저녁이 되어 가려 하는데 이 세상의 모든 저녁에서 사라진 당신 주여 내가 만족합니다 당신이 이루지 않고 떠난 저녁 그러나 마침내 저녁이 오고 있다 그러나 저녁이 오고 있다라는 문장은 끝끝내 저녁 바깥에 있고 지은 적 없는 죄가 불현듯 선명해지려 한다
백년모텔
열두 해 전에 헤어졌던 여자가 병이 들어 찾아왔다 오늘은 낮이 가장 긴 날이고 내일은 동쪽으로 흐르는 강을 찾아 머리를 감는 날이다 나는 아직 모른다 낙숫물 소리는 여전히 가난하다 워킹팜은 일 년에 십 센티미터씩 움직인다 그러고는 일 년 전의 뿌리를 미련 없이 잘라 낸다 나는 아직 모른다 닭내장탕을 먹다 보면 삼양동 골목길이 떠오른다 내가 쓴 문장들은 서로를 조금씩 오독한다 한번 시작된 생은 멈추지 않는다 그래 인정한다 너는 나보다 조금 덜 미쳤던 거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물은 성교를 끝낸 뒤 슬픔을 느낀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 방금 전까진 개였는데 비로소 개가 된 느낌적 느낌이랄까 개로 오십 생을 살고 나면 인간이 된다고 한다 나는 아직 모른다 평생을 조롱받으며 사는 덴 딱 하룻밤이면 충분했다 오늘을 과연 무슨 요일이라고 말해야 할까 마야인들이 남긴 일력에 따르자면 우리는 이미 죽어 있다 자신을 모욕하는 일은 참 쉬운 일이다 그날 본 꽃의 이름을 나는 아직 이해할 수 없다 다행이다 나만 나를 증오한 게 아니었다 나는 아직 모른다 모나크나비는 독풀 위에 알을 낳는다 내게 남은 건 머리카락 몇 올이 전부다 손가락이 자꾸 파래진다 벽지 속의 물고기가 화석이 되어 간다 나는 아직 알아서는 안 된다 오늘도 사랑할 사람이 생기려 한다 아직 세지 못한 은전들이 낭려하다 나는 선택했다 내 세월 속에 남기로 그러나 나는 모른다 작약을 심었던 마당은 불안으로 가득하다 모든 길의 끝에는 무덤이 있다 쓰고 버린 이름들을 태운다 하루가 지나고 다시 또 백 년이 시작되는 중이다 나는 결코 모른다 내가 사랑하지 않았다면 아름다웠을 여자 다 기억나려 한다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必
눈, 저 눈, 저 텅 빈 눈, 저 텅 비고 새까만 눈, 공활한 눈, 티끌 하나 없는 눈, 유리구슬 같은 눈, 한때 하늘을 날아다녔던 눈, 이젠 지저귀지도 울지도 않는 눈, 더 이상 눈이 아닌 눈, 너무 말이 없는 눈, 너무 의미가 없는 눈, 천 개의 눈동자를 가진 눈, 흑색 왜성, 수백억 수천억 년 동안 사라지고 있는 눈, 꼼짝하지 않는 눈, 어떤 다짐도 없이 앞만 바라보고 있는 눈, 숨도 쉬지 않는 눈, 눈뿐인 눈, 오로지 눈인 눈, 눈만 남은 눈, 녹지도 썩지도 않는 눈, 죽었는데 죽지도 않는 눈, 죽지 않고 빤히 바라보는 눈, 바라보기만 하는 눈, 내가 이 길을 지나갈 때까지 내가 이 길을 지나가다 잠시 멈춰 설 때까지 내가 이 길을 지나가다 잠시 멈춰 서서 문득 쳐다볼 때까지 영원인 듯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눈, 속절없이 대책 없이 눈뜨고 있는 눈, 내 눈을 관통하고 있는 눈, 내 해골을 꿰뚫고 있는 눈, 맞바라보다 불타 죽을 것만 같은 눈, 저 눈, 처음부터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고 있는, 눈, 완벽한, 눈, 滅, 다시 滿開하는, 꽃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