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영모는 오직 자율신앙을 강조했다. 모든 신앙인은 홀로 스스로 신을 만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은 어디에 있는가. 신은 어디에도 있을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인간 속에 ‘얼(성령)’로 들어와 있다. 이것이 류영모가 말하는 ‘얼나’다. 얼나는 인간 개개인의 생각 속에 들어 있지만, 신과 개인을 잇는 매체다. 류영모는 인간과의 대면으로 신과의 대면을 대체하려는 종교에 대해 경고했다. 신앙은 철저히 신과 나의 단독자 대면일 뿐이며, 스스로 찾아나서는 자율행위일 뿐이라고 언급했다. 이 시대 교회들이 정부의 방역지침을 어겨 가면서까지 집회와 행사를 강행하는 까닭은 신앙의 독실함 때문이 아니다. 종교가 비즈니스화하고 집단의 권력으로 바뀌어 갑자기 그 생존의 기반을 바꿀 수 없는 비종교적인 이유 때문이다.
돌이켜보자. 코로나19는 종교의 민낯을 드러나게 하고 그 왜곡된 양상을 스스로 실토하지 않을 수 없게 한 측면이 있다. 류영모는 종교가 갖고 있는 그런 측면이 정작 종교가 해야 할 참을 행하지 않게 된 비극을 낳았다고 진단했다. 그것은 코로나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가 안고 있는 문제의 노출일 뿐이다. 류영모는 이런 점에서도 선각자였다.
--- p.8-9
맹자는 류영모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기의 마음을 다하는 자는 자기의 성性을 알 것이니, 자기의 성을 알면 하늘을 안다. 자기 마음을 보존하여 그 성을 기르는 일이 바로 하늘을 섬기는 도리다. 일찍 죽거나 오래 사는 일에 개의치 않으면서 몸을 닦으며 기다리는 일은 하늘의 명령을 보존하여 세우는 방법이다.” 다시 맹자는 목숨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목숨은 하늘의 명령이다. 모든 것이 하늘의 명령이 아닌 것이 없지만, 자기에게 주어진 바른 목숨을 순리대로 받아야 한다. 하늘의 명령을 아는 자는 쓰러지는 담장 아래 서 있지 않는다. 자기의 도를 다하고 죽는 자는 바른 목숨이며, 형벌을 받아 죽는 자는 바른 목숨이 아니다.”(《맹자》 진심장구 상편 제46장)
나라가 무너지는 시절, 모든 삶이 허물어지는 듯한 시대에 소년 류영모는 이 같은 맹자의 강렬한 명령과 가르침 속에 파묻혀 년을 살았다. 이것은 그가 기독교를 만나게 되면서 정신의 천지개벽을 느끼게 될 때, 그 ‘폭발’을 이루는 긴요한 질료가 되었다. 그는 《맹자》를 강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장자莊子도 맹자도 다 성령聖靈을 통했다고 생각해요.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그렇게 바탕性을 알 수가 없어요. 맹자와 장자는 성령을 통한 사람인지라 꿰뚫어본 것입니다. 볼 걸 다 본 사람들입니다. 어느 날 《맹자》를 펼치니 이런 말들이 다 나오지 않겠습니까? 쭉 읽어보고는 섬뜩해졌습니다. ‘이렇게도 맹자가 깊고 깊은 사람이었나.’ 하고 말입니다.”
--- p.48
탐진치貪瞋癡를 인간이 지닌 세 가지 독기라 일컬은 것은 불교다. 류영모는 이것을 사람이 지닌 짐승 성질이라고 했다. 짐승은 먹고 교접하고 으르렁거린다. 인간도 이 성질에 빠져 있으면 짐승을 벗어나지 못한다. 동물학자들이 동물의 본능을 feeding(탐) , ghting(진) , sex(치)라고 말한 것과 일치한다. 세기의 사상은 탐진치에 대한 재발견에 기초한다고 할 수 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치, 즉 육욕에 대해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로 풀어나갔다. 탐(식욕)과 진(으르렁거림, 분노)에 주목한 사람은 카를 마르크스였다. 그는 이 관점을 바탕으로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를 재설계하여 세기를 움직인 사회주의 사상을 만들었다.
이들의 사상은 인간의 탐진치가 육신과 의식의 조건이라는 전제를 기반으로 세워진 것이다. 류영모도 이것을 인정했다. 과연 탐진치가 세 가지 독인가. 짐승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이 생존과 번식의 기반이 아닌가. 세 가지 독이 아니라 세 가지 미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람도 탐진치가 있었기에 만 년을 버텨왔다고 할 수 있다. 그 짐승 성질이 인류 종족을 생존하게 하고 번식하게 했기 때문이다. 탐진치가 인간 생존의 살림 밑천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다석은 탐진치는 그 기본적인 ‘기능’에서 제어되어야 하고, 인간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는 무엇인가를 지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 p.109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유명한 프랑스의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톨스토이는 거룩한 신”이라고 단언했고, 러시아 혁명을 이끈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거대한 바윗덩이이자 엄청난 거인”이라고 평가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과학자라 할 아인슈타인도 “우리 시대에 톨스토이보다 중요한 예언자는 없다.”고 했다. 톨스토이에 쏟아진 당대와 후대의 많은 예찬들은 주로 그의 문학에서 기인하는 것이지만, 그의 위대함의 진면목이 종교사상에 있음을 제대로 주목한 사람은 류영모였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은 서양의 정통 기독교 신앙과 거의 같은 유속流速으로 흘러들어온 ‘기독교에 대한 톨스토이적인 성찰’을 동시에 만났다. 톨스토이는 놀라운 종교사상가이자 실천가였다. 그는 20세기를 숨 쉰 ‘성자’였고 기독교의 교리 신앙에 의문을 던지는 이들에게 새로운 눈을 열게 해준 영적인 스승이었다.
1910년 3월 오산학교에 이광수가 왔을 때, 18세였던 그의 머릿속에는 톨스토이가 깊이 들어와 있었다. 이광수는 오산학교에 오기 전에 일본 도쿄 메이지학원 중학부를 졸업했다. 그 시절 동급생이었던 일본인 야마사키가 가지고 있던 톨스토이의 책을 탐독한다. 일본에서 귀국할 때는 아예 톨스토이 전집을 가지고 왔다. 오산학교로 올 때는 톨스토이의 통일복음서를 지니고 왔고, 그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그해 11월 톨스토이 추도식은 ‘교사 이광수’의 9개월여 교육의 힘이 컸을 것이다. 그날 학생들은 걸출한 러시아 문학가를 추도한 것이 아니라, 동시대를 숨 쉬다 간 위대한 성자를 추도하고 있었다.
--- p.151-152
함석헌 사상은 신앙의 생명성과 주체성을 강조한다. 자라나는 신앙을 역설했고, 내 마음속에 존재하는 신을 중시했다. 이 또한 류영모가 실천을 통해 보인, 자율신앙과 씨알정신의 정수다. 예수가 아닌 그리스도를 믿는 사상 또한 류영모의 가르침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의 영성을 받은 인간이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육신의 예수가 아니라 영성의 예수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예수가 인간을 위해 피를 흘렸다는 대속신앙과 십자가의 예수육신 경배에 대한 문제의식을 낳게 된다. 함석헌은 바라보는 십자가에서 몸소 지는 십자가를 강조하는 쪽으로 나아갔다고 말했다. 이것은 스승 류영모가 했던 말이기도 하다.
함석헌은 세상에 나서서 한국 민주화를 일구는 ‘투사’의 역할을 했지만, 류영모는 은둔과 금욕을 통해 신과의 대화로 고독하지만 강력한 사상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 자율신앙과 치열한 생각의 불꽃으로 피운 ‘얼나’의 전진은 류영모에게 고유한 것이었다. 류영모와 함석헌은 서로에 대한 경모敬慕를 유지하면서도, 사상의 결론은 상당한 차이로 벌어졌다고 할 수 있다. 함석헌은 시대의 흐름을 만들어내고 공동체의 실천으로 종교적 신념을 관철하며 세상의 진화에 기여했지만, 이 땅의 신앙사상을 개척한 류영모의 ‘영적 공간’에는 온전히 접근할 수 없었다. 스승 류영모와 달리, 함석헌에겐 성령으로 임재한 ‘신’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류영모의 우주론적 사유, 가온찍기에서 드러나는 독창적인 존재론과 실존의식, 성령에 대한 심오한 탐구, 사상을 개념화하는 고유 언어의 발굴과 해석과 제시, 인간 육신에 대한 단호하고 실천적인 분별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 p.246-247
류영모는 광주를 좋아했다. 그것을 빛고을이라는 우리말 이름으로 부른 것도 그런 마음이 우러나온 결과였다. 함석헌은 스승이 지은 빛고을이란 말을 즐겨 사용함으로써 대중적인 낱말로 만들었다. 그가 ‘빛고을’이란 말을 쓴 까닭은, 단순히 자연의 빛이 고운 마을이란 보편적인 의미가 아니라, 얼의 빛이 빼어난 영적 도시라는 특별한 뜻을 담기 위해서였다. 광주는 이세종, 최흥종, 이현필로 이어지는 호남 영맥靈脈이 한국 현대사 속에서 세계적인 정신으로 발흥發興한 곳으로, ‘금욕적이면서도 자기희생적이며 또한 실천적인 기독교 운동’의 메카라고 할 수 있다. 류영모는 광주에서 살고 싶어 했으며, 광주의 영성을 특별하게 여겼다.
류영모는 무등산無等山을 ‘없등업등뫼’라고 부르기도 했다. 무등無等이란 ‘등급을 매길 수 없는’ ‘가장 높은’이란 뜻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단순히 높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의 등급이 없는 평등과 초월의 정신을 담은 것이라 할 수도 있다. ‘업등’은 어린 아이를 업으려 어머니가 내민 평평하고 널찍한 등이다. 품보다 넓은 등이 바로 ‘업등’이다. 빛고을과 없등뫼는 광주의 높은 ‘종교성’을 함축한 낱말이 아닐 수 없다.
--- p.320
그는 정통신앙을 안고 살았던 김교신에게 스스로가 추구했던 ‘참의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간증하러 간 것이 아닐까. 예수는 성령을 받고 태어나, 광야의 시험과 십자가의 대속을 거쳐 인자人子임을 인정받았다. 파사의 과정이 뚜렷하다. 그러나 이후의 기독교는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재확인하는 방식을 중심으로 하여 신앙체계가 구성된다. 신과의 대면은 나를 극복하는 깨달음이 아니라, 불변의 믿음을 증명하는 일상신앙에 가까웠다. 그 믿음의 일상화를 주도한 것이 교회라는 매개이기도 했다.
류영모는 그 정통에서 벗어났고 입문 38년 만에 예수와 같은 ‘파사일진’을 경험한것이다. 《성서조선》은 당시 조선 기독교의 ‘정통’을 상징하는 신앙체계의 중심이기도 했다. 김교신과 《성서조선》에 비정통 신앙의 ‘승전보’를 알리는 일은 류영모의 종교적인 신념이 옳음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일이었다. 백 마디 설명이 필요 없었다. 이보다 중요한 증거가 어디 있었겠는가.
그런데 류영모의 글을 읽고 난 뒤 김교신은 그의 뜻을 짐작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다만 그 글 속에서 류영모가 예수를 주主라고 불렀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서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이 어른이 어찌 예수를 주라고 부르게 되었는가.” 《성서조선》 동인들은 류영모가 그들의 정통신앙으로 돌아온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그가 ‘주’라고 부른 것은 하느님이 보내신 얼의 나였다. 예수의 마음속에도 들어왔고 류영모의 마음속에도 들어온 바로 그것이었다. ‘주’는 말씀이며 성령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며, 정통신앙에서 예수를 가리켜 구세주라고 말하는 한정적 의미의 ‘주’가 아니었다. 류영모의 승전보를 오히려 항복문서처럼 오해한 어리석음이었다.
--- p.366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고 대단하게 여기는 것들, 즉 ‘빛’, ‘깸’, ‘삶’, ‘많음’보다 더 본질적이며 더 위대한 것 바로 ‘어둠’, ‘잠’, ‘죽음’, ‘하나’를 밝혀 놓은 역설의 시다. 류영모의 생각이 어디서 왔는지를 살피게 하는 힌트이기도 하다. 우리는 빛이 어둠을 이긴다고 생각한다. 도시문명 속에서는 확실히 빛이 강해 보인다. 그러나 칠흑 같은 어둠이 있는 원시의 밤에는 어둠이 빛보다 더 강력하다. 등불조차도 일렁거리며 어둠에 삼켜질 듯 불안하다. 우주의 어둠 속에선 빛은 미약하며 순간적이다. 밤하늘 별빛들은 어둠 속에서 사라질듯 깜박일 뿐이다.
다석의 어둠론은 이 세상의 밝음이 본질이 아니라 어둠이야말로 우주를 아우르는 거대한 품이라는 인식의 산물이다. 저녁은 어둠이 찾아오는 문턱이다. 빛이 걷히고 암흑이 들어앉는 그때, 류영모는 절대와 교신할 기회를 얻는다고 믿었다. 신에 대한 찬송은 저녁의 찬송이었다. 세종석신世終夕信, 목숨이 끝나면 저녁을 믿는 법, 저녁은 거룩의 냄새를 맡고 거룩과 가까이 하며 거룩을 닮아 가는 시간이었다.
--- p.4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