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열차 통로는 움직일 때마다 서로 간에 몸이 스친다. 창밖으로 자작나무 숲이 쉼 없이 지나가고, 어느 때는 호수를 지나기도 한다. 봄의 초입에 살아나는 잎들이 제빛을 찾으려면 한 달은 더 필요한 시기에 나는 철마에 올랐다. 여행은 시기 선택도 중요하지만, 직업이 여행 아닌 이상 꼭 그럴 수는 없다.
차창 밖에는 자작자작 연둣빛 물을 빨아올리는 나무들이 도열해 있다. 들판에는 앉은뱅이 고슴도치 같은 풀들이 가득 차 있다.
밤을 새워 하바롭프스키까지 달려온 열차가 정차했다.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롭스크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도시로 많은 손님들이 오르고 또, 내린다.
열차도 멈추어 숨을 고른다. 나도 잠깐 내려 아침 공기를 마셔본다. 하차와 승차를 구분한 열차는 다시 출발한다.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크고 작은 역들을 지나는 동안 열차마다 색깔이 다양다종으로 철로에서 쉬고 있다.
석탄과 목재를 가득 실은 열차, 기름을 잔뜩 담은 통 굵은 탱크 기차, 짐으로 보기에는 아름답기만 한 자작나무를 터지도록 실은 기차까지, 하얀 빛깔로 도드라진 무늬가 눈부시게 발광한다. 자작나무가 잘린 건 아름다워서일까?
--- p.21 「횡단열차에서」 중에서
산을 내려 올 때는 이미, 내 발자국은 눈에 흔적도 없이 묻혀버렸다. 눈 위로 길을 내며 내려가는 시간에 생과 사의 순간들이 수시로 내 머릿속을 쑤시고 지나갔다. 뒤에서는 눈밭이 다리를 잡는다. 앞에서는 미친 듯이 몸으로 파고드는 눈보라를 견디고 어떻게 내려왔는지 반쯤은 호수의 신이 도와주었다.
이 악천후에 호수에 올랐다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그 가치는 분명 있지만, 위험을 감수한 것은 무모한 행동임을 후에야 나는 반성한다. 산행을 마치고 죽을힘을 다해 내려왔을 때, 우리를 보고 있던 관리소 사람들이 엄지 척을 해준다. 대단하다는 의미지만 내 얼굴은 화끈거렸다.
아침에 나를 태워다 준 택시를 다시 콜 했다. 관리소 앞에서 삼십 분을 기다려 기사와 만났다.
일곱 개의 호수 중 다섯 개를 보았다. 순간의 위험을 코앞에 둔 산행에 미련 같은 건 없다.
--- p.100 「세븐레이크 호수」 중에서
나는 벽면에 걸어놓은 그림들을 하나하나 찾아가다 마리아가 푸른색 한복을 입고 예수는 색동한복을 입은 한국을 표현한 작품 앞에 섰다. 꽃을 상징해 양손으로 무궁화 두 송이 안에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 얼굴을 본다. 한복 입은 모습에 절로 미소지었다.
‘평화의 모후여 하례하나이다’라는 문구가 눈에 크게 들어왔다. 온화한 모습으로 아기를 안고 있는 마리아는 영락없는 한국의 모성 깊은 엄마의 모습이다.
--- p.176 「나사렛(Nazareth)」 중에서
고대나 현재나 이집트인에게는 자궁, 탯줄과 같은 신의 축복인 나일강이 있다. 이집트 문명의 생명줄이다. 아프리카 빅토리아호에서 발원해 북동쪽으로 이집트를 지나 지중해로 흘러들며 길이는 약 6,671㎞로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이다.
아스완에서 펠루카(felucca)를 5분 정도 타고 강 건너편 마을 엘레판티네섬에 내렸다. 섬이라야 길이 2.4㎞ 됨직한 시내 맞은편에 미운 오리처럼 밀려나 있는 작은 마을이다.나일강은 문명도 정반대인 둘로 나눴다. 진흙 벽돌을 쌓아 원초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아스완 시내 삶과는 동떨어진 차이를 보인다.
마을에는 의외로 있을 건 다 있다. 진흙에서 건진 유적과 박물관이 있다. 유적터는 넓지만, 복원은 멀어만 보인다. 고고학 유적지 입구부터 박물관 입구까지 이르는 계단은 그리스와 로마가 이집트를 지배하던 그레코-로만시대(BC 330~AD 641)에 건설된 것이다.
마을 정경과는 다르게 박물관만은 잘 보존되고 있다. 군데군데 증축되는 새 건물들이 주변과 도드라져 보이지만 세월의 때가 묻다보면 그 또한 조화를 이룰 것이라 믿고 싶다.
--- p.236 「엘레판티네섬(Elephantine island)」 중에서
등대는 바쁘다. 외롭지 않다. 뱃길을 잃거나 암초를 만나지 않게 선박에 불길을 내야하고 자신을 철저한 고독으로부터 분리해 등대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도 보듬는다.
꿀벌이 바쁘게 날갯짓을 하듯 쉼 없이 큰 눈을 부릅뜨고 바다를 바라보면서 지휘봉을 흔들어 바다를 연주해야 한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바다가 외롭지 않도록 그리고 안전하게 길을 갈 수 있도록 혼신의 지휘를 해야 등대는 기쁘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체험은 삶에 동력이 된다. 더구나 숱하게 보고 흘려보냈던 과거의 등대들이 산토리니에서 첫사랑 경험처럼 시공간의 충격을 넘나드는 것은 왜인가?
절벽 위에 외롭게 서 있는 늙은 등대 아래서 내 둥지를 떠올리는 후유증이 바늘 끝처럼 찌른다. 빨, 주, 노, 초, 파, 남, 보색의 등대가 연미복을 입고 바다를 향해 지휘한다.
--- p.281 「등대에서」 중에서
거침없이 소화해낸 일정이었다. 배낭 무게가 어깨에서 느껴진다. 그래도 아쉬운 곳이 있다. 알제리와 튀니지가 중동여행 목적이었다. 알제리 비자 불발로 이집트 여행 후 느닷없이 방문한 그리스에서 나는 파란 물이 들도록 바다와 섬들을 보았다. 섬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내고 싶을 만큼 보았다. 내가 어디에서 강하고 어디에서 약한지를 들여다보는 여행이었다. 사진으로만 남기는 여행이 아닌 더 짜임새 있는 여행을 하고 싶었다. 삶과 정신에 강한 인상을 남기는 일이 될 것이란 긍정으로, 여행지에서 겪은 경험을 통해 느끼고 사유하는 것들을 소소한 내 언어로 풀고 싶었다. 타자와의 관계, 인생의 의미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 p.306 「여행이 끝나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