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존재론
1. 인간 본성으로서 자연
자아(自我)의 존재
우선 나는 누구냐는 이런 질문을 제시한다. 그러면 ‘나’란 사람은 누구냐? 내가 신장(身長)과 체중이라는 신체적 특징 그리고 희로애락 같은 나의 심리적 현상을 가지면서도 그런 것은 진정한 ‘나’ 자신이 아니다. ‘나’란 모양이 없어서, 외계의 사물처럼 기사에서 언급도 하지만,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그렇게 무한한 일을 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새삼 반성하고, 학문적으로 파악하자면, 심리학이나 여러 가지 과학이 나오겠지만, 그것은 본래 당연히 ‘나’란 사람을 이용한 것은 아니다. 손으로 뜬다고 해도 그 손에서 줄줄 새는 물처럼 그런 독자의 존재이다. 그 한도에서 ‘나’란, 인간의 존재란, 어떤 의미에서 한 개의 수수께끼이다.
참 ‘나’를 찾기 위해 거기에 신비로운 것이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이 초월적인 ‘나’란 사실은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라는 것은, 여러분은 지금이라는 시간을 파악할 때는, 지금은 이제 없어지고 있다. 지금은 절대로 대상화 하여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이라는 시간은 파악할 수 없지만, 여러분은 아는 것이다. ‘지금’은 어떤 것인지를 아는 것이다. 모르면 자신의 사라진 과거에 책임을 맡길 수는 없다. 반성하고 대상화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본성과 융합하고 이를 직접적으로 파악한다는 뭔가 이런 별종의 인식능력이 사람에게 갖춰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려운 말이 되겠지만, 오히려 여러분은 혼란스러울지 모르겠지만, 질문은 무엇인가? 질문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질문한다는 것, 묻겠다는 것은 사실 인식하는 대상을 어느 정도 아는 것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에 완전한 지해(知解)지해(知解)를 요구하고 묻겠다는 자세가 가능한 셈이다.
“두드려라 그러면 문은 열리리라”는 말이 있지만, 탁 쳐야 문은 듣는 것이다. 묻겠다는 것 중에 사실은 답이 절반이 들어 있다. 여러분은 그 답을 선행적으로 반은 알고 있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이 파악이 되지 않는 ‘나’란 직관적으로 자신의 본성에 융합한 것을 받아 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물과 같은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나와 사물은 로마법로마법에서 말하는 대응이 아니다. 사물처럼 대상화할 수 없는 각별한 인격(persona), 이른바 존엄을 구비한 존재다움은 직관적으로 여러분이 안다. 그래서 개인을 사물처럼 다루어서는 안 된다. 도구처럼 다루어서는 안 된다. 그런 존엄을 가진 존재임을 우리는 저절로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아(自我)의 유한성과 초월성
이러한 존엄성은 특히 영혼의 정신부분에서 유래하지만 인간은 동시에 신체와 육체를 갖추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아무래도 그 육체에 따른 생로병사라는 것이 늘 따라다니며 떠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자신 때문에 고통을 불러서 가까이 오게 하는 일도 있고, 별똥별이나 지진이나 쓰나미처럼 자신은 아무것도 나쁜 짓을 하고 있지 않아도 그 해악을 입거나, 이러한 부조리한 피해라는 것도 있고, 인간의 세상은 어쨌든 살기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역시 사람이 신체를 갖고 있다는 제한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보면 만악의 근원에는 인간의 본성은 실은 어느 정도 손상되지 않는 완전하지 않은 실상이 있는 것 같다. 즉, 신은 존재의 완전한 현상으로 충실하기 때문에 존재의 결여한 악은 존재하지 않지만, 인간은 존재의 완전한 충실을 갖지 못하고 일부분 그 허무를 안고 있다. 그 허무 속에서 여러 가지 인간의 제한성, 한계성, 그리고 비극이 나온다. 독자는 이것도 저절로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태를 거꾸로 생각할 수도 있다. 사람이 유한하다는 것을 안지가 오래되었다는 것, 인간에게 ‘한계’가 있음을 알았다는 것은 ‘한도가 없다’고 하는 사태를 반대편에 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즉, 끝이 없다는 것을 알면 어떤 무한이라는 것에 대한 감각이라는 것, 이것이 아니라면, 한계가 있다는 의식은 원래 나오지 않을 것이다. 끝이 있다는 것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뭔가 무한한 것에 대한 경향이라는 것이 저절로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평소 건강하다면 그런 것은 그다지 생각하지 않겠지만, 긴 인생 속에서 죽음에 직면하는 병을 앓거나 혹은 사업에 실패하고 낙오하여 삶의 대열까지 사선(死線)을 넘나들고 있으면 다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이 나타난다. 그때 평소에 생각지도 못한 것이 갑자기 자신의 의식의 전면을 차지한다. 그렇게 한 때에 자신이 안고 있는 허무, 고통, 이를 메우기 위해서 무엇인가 완전하고 무한한 존재, 이런 것을 요구하다가 이러한 경향성이 저절로 생긴다는 점이 인정되지 않을까 의심한다. 즉, 인간은 본성 때문에 무화(無化), 허무화(虛無化)의 경향을 안고 이를 끊임없이 물으며 이를 초월하고자 지향하는 존재가 된다.
그런데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거꾸로 나의 존재는 이제 초월자가 되므로 후회하지 않는다. 나의 존재는 초월자초월자로 한정되어, “지금 여기에 있다”는 식으로 포착하게 된다. 즉, 내 존재는 무한자로부터 지금 이 시각에 보낸 것이고 이런 것을 선물로 이해한다. 불가항력의 현실을 해결해 달라고 촉구한 끝에 마침내 통한다고 할까? 내몰린 곳에서 마음을 홀연히 벗어난다. 이는 회심(回心)이고 아마 불교에서도 그렇게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공통의 자세가 인정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