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요한서신이 포함된 공동서신은 바울서신과 본질상 충돌하지 않으며 반(反)바울적이 아니라 비(非)바울적이라 할 수 있다. 공동서신은 바울서신과 함께 균형을 맞추며 서로 보완하는 관계에 놓여 있고, 이를 통해 초기 교회의 신학과 ‘신앙의 규범’(regula fidei)을 세워 나아가려 했던 결과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공동서신은 ‘믿음과 행함’에 관하여 바울의 복음을 오해하지 않도록 바로잡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로마라는 세상 속에 존재해야 했던 교회를 위한 정통 신학과 신앙을 제공한다
---「서론. 1. 공동서신 안에서 요한일서의 위치」중에서
무엇보다, 요한서신이 제시하는 교회의 본질은 ‘코이노니아’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두 가지의 큰 신학적 축의 만남의 결과이다. 그 하나는 구약에서 이미 예언된 새 언약의 내용이 종말론적으로 성취된 결과로서 ‘코이노니아’이고, 다른 하나는 ‘묵시론적 이원론’을 배경으로 세상과 충돌하며 세상을 이기는 교회로서 ‘코이노니아’의 모습이다. 요한서신이 묘사하는 ‘코이노니아’로서의 교회는 ‘에클레시아’와 함께 교회의 정체성과 본질을 표현하는 또 다른 용어라 할 수 있다. 그 차이는, 에클레시아가 ‘…으로부터’(from) 부름 받아 나오게 된 언약 백성의 해방과 세상을 향한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가리킨다면, 코이노니아는 그래서 ‘…에로’(into) 이르게 된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의 삶과 그 영광의 본질적 내용을 가리키는 표현에 가깝다는 것이다. 예컨대 구약의 옛 언약 백성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집트에서 나와 광야로 들어가게 된 것을 ‘에클레시아’라고 한다면, 그들이 결국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가 거기에 거(居)하며 누리게 되는 언약 백성의 특징적인 생명의 삶을 ‘코이노니아’라 할 수 있는 셈이다.
---「서론. 1. 공동서신 안에서 요한일서의 위치」중에서
요한일서 1:1-4에서, 태초부터 ‘있어 온’ 생명의 말씀이나, 그 생명의 말씀이 아버지와 함께 ‘있어 온’이라 표현된 미완료형은, 영원 전부터 지금까지도 그런 관계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반면에, 그 생명의 말씀이나 영원한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되었다’(1:2)는 것은 부정 과거로, 뒤바꿀 수 없는 확정적인 사건을 표현한다. 마치 출애굽 사건이나 십자가와 부활 사건처럼, 그 확정적인 구속사적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해방된 측면을 가리킨다. 그리고 무엇보다, ‘들었고, 보았고, 만졌다’(1:1-3)는 완료형의 표현들이나 ‘증거한다, 전한다’(1:2-3)에 사용된 현재형의 표현들은 모두, 그 나타내신 바 된 영원한 생명을 경험하고 누리고 나누는 차원, 곧 코이노니아의 현재적인 ‘교제의 차원’을 가리키는 표현들이다.
---「제1장. 코이노니아, 탄생과 소속(1:1-10) 2. 코이노니아의 탄생(1:3-4)」중에서
먼저, ‘자녀들’을 살펴보자. 흥미롭게도 12절에는 ‘자녀들’로 되어 있고, 14절에는 ‘아이들’로 되어 있다. 같은 영적인 초보적 상태를 나타내는데 그 표현이 다소 다르다. 왜 다를까? 큰 차이는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자녀들아’라는 호칭은 주로 ‘생명적 관계’를 연상하게 만든다. 원래 ‘자녀들’(테크니아)은 부모와 자식 사이처럼 혈연으로 낳은 자녀들을 지칭하기에 적당한 용어이다. 반면에 ‘아이들’(파이디아)이라는 호칭은 장성한 어른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즉 아직 성장해야 할 과정이 더 많이 남아 있는 ‘미숙한, 어린’아이라는 뉘앙스가 더 크다. 이런 차이가 억지스럽지 않은 이유는, ‘자녀들’이 사용된 12절과 ‘아이들’이 사용된 14절의 내용이 각기 다르고, 그 다른 점들이 각기 그 칭호들과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12절에서는 특징적으로 ‘자녀들’의 ‘죄가 사해진’ 점이 강조되어 있다. 죄가 사해졌다는 것은 ‘거듭남’을 상징한다. 죄 사함을 받고 죽음에서 벗어나 부활 생명을 얻은 자로서,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제2장. 코이노니아, 보장과 확증(2:1-27) 3. 코이노니아와 승리[a](2:12-14)」중에서
코이노니아는 코이노니아를 낳는다. 그래서 코이노니아는 열린 공동체이다. 코이노니아는 나눔과 사귐의 방식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요한일서의 가장 큰 주장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육체로 세상에 보내셨다’는 사실이다(2:22 4:2). ‘육체로’가 결정적이다. 그 영원한 생명도, 그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의 사랑도, 모두 ‘육체로’ 세상 한복판에, 죄와 죽음과 허무가 지배하는 이곳에, 그 아들의 찢긴 살과 흘리신 물과 피로, 부활 생명의 육체로 ‘실제로 나타나셨다.’ 1세기 당시 로마 사회에서 구원이란, 철학에서든지 초기 영지주의에서든지, ‘육체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었기 때문이다. 인구의 3분의 1이 노예였던 사회에서, 자유와 구원이란 이런 감옥 같은 육체를 벗어나고, 영혼을 가두는 물질세계에서 영원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바로 이런 곳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 아들을 ‘육체로’ 보내셨다. 그 아들은 육체로 와서 육체로 죽으시고 육체로 부활하셨다. 세상은 더 이상 버려진 곳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처럼 사랑하신’ 대상이다. 구원이란, 이 세상을 떠나 육체를 벗고 어디 저 멀리 있는 천당에 가는 것이 아니다. 육체 안으로, 세상 안으로 들어온, 그 아들의 생명과 빛과 진리, 그 아버지의 사랑의 침투이다
---「에필로그. 코이노니아, 커버넌트의 성취를 통한, 코스모스의 회복」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