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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깨어나 혼자

가만히 깨어나 혼자

b판시선-045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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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8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151쪽 | 218g | 124*194*12mm
ISBN13 9791189898588
ISBN10 1189898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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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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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깨어나 혼자

속초 사는 Y시인과 양평 사는 K시인을 가끔 떠올린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의 생활에
끼어드는 것 같은 가끔이다

Y시인은 고향에 살고 있지만
가보면 고향 부근일 뿐
K시인은 양평에 살고 있지만
가보면 타향 부근일 뿐
실은 가본 적 없다

가본 적 없는 두 사람을 가끔 꺼내 읽는다
꺼내 읽을 때마다 베개를 끌어안고
내게 과분한 혼자가 있다
그럴 때면 차부에서 내려 편의점을 지나고
가로수 길을 걸어 귀가하는 그들의 등이 보인다

우리가 잔이나마 앞에 두고
한자리에 앉은 게 십 년은 더 되었다
누가 술을 따랐는지 기억에 없다
두 시인 사이에 끼어든다는 게
이렇게나 희미한 기억이다
희미해지면 다시 두 시인을 꺼내 읽는다

“양평 한번 내려와”
그 말을 여태 기억하고 있을까
속초도 양평도 두 시간 남짓인데
보고 싶지만 혼자가 좋다
두 시인도 혼자가 좋을 것이다
혼자 시를 짓다가 무너뜨리고
다시 시를 짓는 혼자
연락이 끊긴 지 오래되었다

언젠가 서울을 떠나게 되면
발 하나는 속초를 향해
다른 하나는 양평을 향해 터벅터벅,
그러자면 나에게 여물을 넉넉히 줄 수밖에 없고
몸이 하나라는 사실이 정말 무섭다

새벽에 눈을 떠서
내가 이길 수 없는 것을 떠올리는 가끔,
아주 가끔이다


멀리서 오는 점성

오늘은 길을 걷다가
허공을 향해 눈을 부릅떠보았다
아주 먼 허공이 아니라
머리에서 한 뼘 위 허공
그러면 내 눈에 습기가 엉켜 드는 것이다

나는 습기가 아주 먼 곳에서 왔다는 것을 안다
내가 기다리는 건 어떤 점성일 게다
멀리서 오는 점성
어제는 친구와 술을 마시며
왜 한 번도 길을 잃어버린 적이 없냐는
말을 들었다 통렬함이 없다는 말도 들었다

그건 좀체 자세를 흩뜨리지 않는
내 소시민적 기질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나에겐 울부짖음이 없고 남루가 없고
방황이 없고 상실이 없고 비에 젖은
무의식의 비애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건 모두 눈물과 관련되어 있다
내가 기다리는 건 멀리서 오는 점성이고
남들은 그런 나의 기다림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른다


고향을 떠나올 때

오래전 아버지가 있었다
광주 계림동 마당 너른 집 툇마루의 기둥을 붙들고 드잡이하던 아버지가 있었다
이렇게 살 바에야 죽는 게 낫겠다며 분통을 터뜨리던 아버지와 아버지의 허리춤을 붙들고 울던 어머니와 야, 야, 이러면 못 쓴다, 아버지의 등을 토닥이던 할머니와 그 연극무대를 토방에서 올려다보던 아이가 있었다

기둥이 뽑히고 지붕이 내려앉을 것 같던 그때
아이와 눈이 마주친 순간
희번덕거리던 눈동자의 살기가 거짓말처럼 삭아들던 아버지가 있었다

임종 사흘 전 아버지에게 물었더니
그런 일이 다 있었더냐
빙그레 웃던 아버지가 있었다

“전쟁 직후 내가 월북한 셋째 형의 자격증으로 유치원에 들어가지 않았겠냐
그러다 차차 자격증을 땄지만 형사놈이 그걸 꼬투리로 매달 월급봉투를 가로채 갔지
내 이름으로 살고 싶어 상경을 했단다”

그때 그 아이가 멀뚱멀뚱 천장만 바라보던 아버지 곁을 지킬 때
이제 마음 편히 한번 가볼까, 하고 기저귀를 찬 채
고향으로 돌아가던 아버지가 있었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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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들)의 ‘실종’이 문학의 실종 공간을 섬세하게 메꿔나가는 그로테스크한 싸움이 저물녘 상처받은 짐승의 울음으로 비어져 나오다가 마침내 그 자신마저 실종시켜버리는 귀면(鬼面)의 시다. 그러고도 남은 울음이 있다면 여전히 발굴되지 못한 실종의 뼈에 바쳐져야 하리라!
- 이산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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