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명성이 높았던 맥아더는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Old soldiers never die, just fade away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 그가 얘기한 ‘다만 사라질 뿐이다just fade away’에 대해 문득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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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첫 번째 프로젝트가 동해안 해파랑길 770킬로미터 걷기다. 극기, 도전, 달성, 자기와의 싸움, 모험, 챌린지 등의 하드코어한 용어는 쓰고 싶지 않다. 그저 트레킹을 하다 힘들면 쉬고, 졸리면 자고, 목마르면 마시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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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해파랑길을 완주한 친구의 말로는, 트레킹 하면서 가장 주의해야 할 점 중 하나가 ‘오버페이스 하다가 숙소를 못 찾아 애먼 곳을 하염없이 걷게 되는 경우’라고 한다. 인생에만 ‘빽도’가 없는 게 아니라 트레킹도 마찬가지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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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나보다 먼저 퇴사한 해정 군과 나는 히말라야 칸첸중가 베이스캠프에 다녀왔다. 그 무렵 우리는 꿈의 순례길 산티아고 800킬로미터 트레킹을 계획했다. 2020년 봄, 나의 안식년 첫 번째 프로그램이던 스페인행이 코로나19 때문에 무산되면서 일이 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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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돈이라고는 서울 올라갈 차비와 숙박비 정도여서 여관 에서 편히 잘 것이냐, 아니면 흥겹게 술 한잔하고 해변에서 노숙을 할 것이냐? 굳이 핑계를 대자면, 그때 해운대 백 사장의 모래가 따뜻하지만 않았어도 결정을 달리했을 테지 만, 결국 우리는 노숙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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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스마트폰 분실 사건을 겪으면서,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이제 스마트폰이란 요물은 가족이나 친구, 신앙, 애완동물, 재물 등등 모든 존재를 가볍게 넘어설 만큼 압도적으로 소중한 존재로 자리 잡은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과연 스마트폰 없이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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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바닥이 고르지 못해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길이 걷기에는 최적이다. 그 이유는 오래 이어지는 딱딱한 평지는 몇 개의 근육만 반복적으로 쓰게 해서 쉬 피로해지고 탈이 나게 되기 때문이다. 발에 물집이 왜 생기는지 생각해보면 이해가 빠를 듯하다. 다양한 부위를 쓰면 상처나 물집 같은 건 안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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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어려서부터 한 가지 강박관념을 가지고 사는 것 같다. 시간은 반드시 생산적으로 보내야 한다는. 일이든 공부든 결과물, 소위 부가가치를 만들어 내야 안심한다. 그런 기준에서 보자면, 노는 데 쓰는 시간은 헛되고 아깝다. 지금처럼 마냥 걷는 일 역시도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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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놀고, 취미를 즐기며 보내는 시간이야말로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이 아닐까. 우리가 사는 목적은 결국 행복이며, 그건 생산적이라기보다는 소비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 돈은 벌 때보다는 쓸 때 더 행복하듯이.
--- p.61
사람에게는 양면성이 있다. 친구도 나도 고지식함 속에 그 정도 유연함은 가지고 있다. 그러니 우리 둘은 30년 이상 한 직장에서 월급을 타 먹고 지낼 수 있던 것이다.
--- p.71
앞으로 비대면 사회가 일반화된다면 도래할 디스토피아를 두고 말들이 많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비대면에 익숙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SNS로 소통하는 게 얼마나 많아졌나!
--- p.74
칠순이 넘고 팔순이 가까워 오면, 미각이 제대로 기능을 못 해서 음식 맛을 못 느낀다는 말을 주변에서 자주 들었다. 그러니 곰곰 이 생각해보건대, ‘내가 온전한 미각을 가지고 메뉴 선택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은 그저 5년에서 길어야 10년이 남아 있을 뿐이다.
--- p.93
37년을 일해온 나로서는, 방송 PD라는 엔진의 시동은 꺼졌지만, 모터는 한동안 탄력을 받아 돌아갈 것이다. 출근 시간이 되면 나가려 할 것이며, 새해 달력을 받아 들면 빨간 날을 세거나, 연휴가 며칠이나 겹치는지 진지하게 체크할 것이다.
--- p.105
어떻게 하면 모양 빠지지 않게, 품위를 지키며 스스로를 리셋reset할 수 있을까? 원초적이고 힘든 일을 오랜 시간 겪으면 새로워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이처럼 길고 무모하기까지 한 도전에 나섰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과연 트레킹을 시작하며 회사 일을 떠올리는 경우가 드물었던 걸 보니 이제까지는 성공인 듯하다.
--- p.106
*부부가 티격태격해도 헤어지지 않고 사는 건 대부분 관계가 좋고 천생연분이어서라기보다는 ‘결정적인 순간’ 혹은 ‘진실의 순간’을 잊지 못해서라고 생각한다. 처음에 매력을 느꼈던 몇 초의 짧은 순간, 어느 때인가 내게 해주었던 고마운 응대나 배려 따위 말이다.
--- p.119
*달리기는 효율이 떨어지는 대표적인 행위다. 자동차나 최소한 자전거로 쉽게 갈 수 있는 거리를 땀을 삐질 흘려가며 한참 만에야 겨우 도달한다. 트레킹은 조깅보다 비효율적이다. 1시간을 꼬박 걸어도 4킬로미터 남짓 갈 수 있다.
--- p.124
사랑하고 용서하는 사람은 거기에 가치를 둔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정직함보다는 남을 속여서 이득을 취하거나 곤란한 상황을 모면하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여긴다. 분노하는 사람, 질투하는 사람, 사치하는 사람. 모두 가치관 문제다.
--- p.124
동해안 해파랑길 770킬로미터의 여정은 내 마음속 얼크러진 번뇌를 얼마나 삭여줄까, 그런 기대를 갖고 출발한 걷기였다.
--- p.125
“독주는 독배다. 일찍 죽지 않으려면 막걸리 같은 약한 술을 마시라”는 현인의 충고도 있고, 달짝지근한 술보다는 텁텁하고 원초적인 알코올이 주당의 본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결국 막걸리 나라로 전향서를 쓰게 된 것이다. 이쪽은 망명도 이민도 반갑게 잘 받아준다.
--- p.155
나이가 들면 세월이 빨리 간다. 그 이유는 그날그날의 단순한 일상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새롭고 흥미로운 경험으로 충만했던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면 하루가 꽤 길었던 느낌이 있다.
--- p.164
사람이 여행에 나서는 것도 시간을 더디게 쓰려는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트레킹을 시작한 지 23일이 지났다. 만일 집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아마 지금보다는 곱절로 시간이 빨리 흘렀을 것이 분명하다.
--- p.165
먼저 퇴직한 남자 선배들을 보면서 왠지 그분들의 확 위축된 분위기를 느끼며 놀랐다. ‘저 선배가 내게 함부로 대하며 상처 주던 그가 맞나?’ 싶어지는 건 달라진 그들의 온화한 태도 때문이다.
--- p.167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지 닷새가 지났다. 해정 군의 표현대로, ‘깊은 꿈을 꾸고 일어난 기분’이다. 나이가 들면 최근에 경험한 일일수록 희미해진다. 치매란 과거의 기억을 잡아먹는 게 아니라 요즘 기억부터 꿀꺽 삼켜 나간다. 마치 활어만 공격하는 상어 같은 존재다.
--- p.201
이렇게 나이를 먹으며 스스로를 잃어갈지 모른다. 앞으로의 내 삶은 ‘추억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아니라, 매 순간의 기쁨과 만족을 향유하는 일’이어야 한다. 어차피 다 잊을 일이니까. 슬퍼지기는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 p.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