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어려울 땐 혀의 힘을 빌린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결국 그 섬, 같이 돼지고기를 먹던 우리 가족의 품이라는 것을. 아무리 싫어도 결국 사랑만이 남는 것이 가족이고, 아무리 아닌 척해 봐야 나는 거부할 수 없는 돼지비계 소녀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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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사람들은 하얀 쌀밥을 ‘곤밥’이라고 불렀다. 먹을 것이 귀한 시절이었다. 보리밥으로 허기를 달랠 수 있는 것이나마 감사해야 했던 그 옛날, 윤기 자르르 흐르는 흰 쌀밥이 겨울날 소복이 쌓인 눈처럼 깨끗하고 고와서 곤밥이라 이름 붙였을까.
나는 이 곤밥에 대한, 동화 같은 이야기 한 편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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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을 다스려 음식을 만드는 어떤 여인의 뒷모습을 보며 자랐다. 부엌의 가스레인지는 두 개의 분화구였다. 여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불꽃 위에 큰 솥을 올려놓고 자식들을 위한 죽을 쑤었다. 부엌의 불씨는 매일 반복해서 타올랐다. 무언가를 데치고 끓이고 삶고 고아대느라 여인은 쉴 틈이 없었다. 나는 여인의 분화구에서 만들어진 찌개와 나물과 국과 고기를 받아먹으며 쑥쑥 자랐다. 여인은 키가 쪼끌락했지만, 부엌에 서 있을 때면 설문대 할망처럼 거대해 보였다. 나에게 숨결을 불어넣고 나의 뼈와 살을 만든 나의 창조주. 나의 여신. 그녀는 나의 어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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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치’와도 ‘브런치’와도 거리가 먼 삶이었지만, 일요일 늦은 아침에 먹는 엄마표 프렌치토스트는 달콤하고 고소한 향내 폴폴 풍기는 우리 가족의 느긋한 브런치 타임이었음이 분명했는데.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후로 엄마표 프렌치토스트는 다시 볼 수 없는 메뉴가 되어버렸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부터는 내 손으로 프렌치토스트를 해 먹기 시작했다. 꼭 일요일 아침을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 안개 자욱한 거리를 혼자 헤매는 것처럼 우울하고 외로운 날이나, 가슴속이 퍼석퍼석하게 말라버린 것 같은 날이면 냉동실 문을 열고 언젠가 처박아 둔 식빵 쪼가리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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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겨울, 나는 곰팡이가 핀 채 썩어가는 귤들을 치우지도 않고 그대로 방치하면서 줄곧 아버지를 생각했다. 꽁꽁 얼었다 녹아버린, 진한 과즙이 다 빠져나가고 썩기 직전의 냄새가 나는 물컹한 귤 알맹이를 하나씩 입에 넣을 때마다 아버지의 약속도 하나씩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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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세공된 보석처럼 반짝이는 모습으로 진열대에 놓이는 케이크가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파운드케이크 윗면이 살짝 타버렸을 때, 애플파이 한 귀퉁이가 부서졌을 때, 생크림으로 장식한 생일 케이크가 어쩐지 울퉁불퉁 못나 보일 때에도, 슈거파우더를 솔솔 체에 쳐서 뿌려주면 허물은 가려지고 매력은 더해진다.
연말은 그런 시간이다. 지나온 날들 위에 슈거파우더를 뿌리듯, 결점은 잠시 덮어 두고 한 해의 완성 그 자체를 축하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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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 ‘섬초 시금치’라는 단어를 읽었을 때에는 왜 시금치의 초록빛만 떠올렸는지 모르겠어요. 뿌리는 이렇게 분홍빛을 띠고 있는걸요. 뿌리와 맞닿은 줄기의 밑동도 역시 붉은 자줏빛입니다. 꽁꽁 얼어버린 손으로 시금치 손질을 하고 있어서인지, 저는 이 뿌리와 밑동이 긴긴 겨울을 버티고 서 있는 시린 발처럼 느껴집니다. 차가운 눈밭 위에 우뚝 선 채로, 모진 바람을 견디느라 빨갛게 얼어버린 발. 뿌리가 튼튼하게 버텨 주었기에 겨울의 한복판에서 해풍을 맞으면서도 시금치는 여러 가닥의 줄기를 뻗으며 무성한 이파리들을 키워낼 수 있었구나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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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도 걸어도, 살아도 살아도, 끝내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거라면 우리,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무심히 걷다가도 또 다른 교차로에서 다시 만나 마주 볼 수 있기를. 잠시나마 웃게 되기를. 바삭한 고구마튀김이나 묵직한 단팥빵, 부드러운 벌꿀 카스텔라 같은, 소박하지만 정겹고 눈물 나도록 달콤한 것들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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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을 넣어 달콤하게 만든 독새기 반숙. 그건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오로지 우리 집에만 존재하는 우리 부모님만의 언어였다. 어린 딸이었던 나는 그들이 아침마다 주고받는 게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노오란 독새기 반숙 안에 몽글몽글 모여 있는, 그 따스하고 보드라운 언어들을, 애틋한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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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중요한 건 빛 한 줌 새어 들어오지 않는 암흑 같은 시간 속에서도 마음의 창을 활짝 열어 두는 일인 것 같아. 어둠이 스스로를 갉아먹지 않도록 매일 창을 열어서 햇살을 쬐어 주고, 상쾌한 바람을 쐬어 주고, 창 너머의 풍경을 상상하며 희망을 놓지 않는 일인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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