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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을 듣는 시간 (큰글자도서)

산책을 듣는 시간 (큰글자도서)

정은 | 사계절 | 2021년 09월 1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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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9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180쪽 | 190*295*20mm
ISBN13 9791160948462
ISBN10 1160948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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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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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외로움이 뭔지 잘 모른다. 대체로 늘 그랬으니까. 나는 소리를 못 듣는다는 게 뭔지 잘 모른다. 마찬가지로 늘 그래 왔으니까. 내 모어는 수화다.
---「첫문장」중에서

내 귀가 안 들리는 이유를 물으면 엄마는 언제나 고래처럼 귀지가 많아서라고 했다. 고래는 평생 귓속에 귀지를 쌓아 둔다고 한다. 이동기와 번식기에는 두께와 색이 달라지는데 그래서 나이테처럼 살아온 이력이 귀지에 그대로 새겨진다고 한다. 고래처럼 내 귀지에도 살아온 이력이 새겨지고 있을까? 언젠가 내 귀지가 그동안 수집해 온 소리를 모두 쏟아 내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믿으며 나는 살아왔다.
--- p.8

아빠라고 짐작되는 사람이 두 명 있다. 아빠와 아빠의 일란성 쌍둥이 형제인데, 둘 중 한 명이 아빠다. (중략) 한 명은 화성 탐사단에 선발되어 화성에 세운 비밀 기지에서 살기 위해 중국의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적응 훈련을 받고 있다. 또 한 명은 콜롬비아의 메데인 카르텔의 제조 팀장으로 카리브해 깊숙이 숨겨진 잠수함에서 코카인을 제조하고 있다. 아마 돈을 버느라 너무 바빠서 나를 찾아올 시간이 없을 것이다. 나의 아빠는 그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 p.8~9

내가 소리를 못 듣는 것에 불편함을 못 느끼듯이 그도 색을 못 보는 것에 불편함을 못 느꼈다. 그는 안 봐도 알 수 있다고 했다. 사람은 냄새만 맡아 보면 알 수가 있다고. 나에게는 좋은 냄새가 나니까,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 p.55

“어른들의 관계란 그런 거야. 사람마다 적절한 거리가 있거든. 가까워지면 결국엔 멀어지지. 그런데 멀어지지 않으면서도 아주 가깝게 다가가는 어떤 지점이 있어. 사람마다 그 적절한 거리를 찾아내서 유지하는 거야. 각 관계를 교통정리 하면서. 쉬운 일은 아니지. 쉽지 않아. 하지만 보람이 있지. 보람이 없기도 하지만.”
--- p.58

“옛날에 어떤 철학자는 별마다 내는 소리가 다르다고 생각했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밤하늘이 악보로 보였겠지. 소리는 결국 주파수고 별들은 주파수를 가지고 있으니까 허무맹랑한 생각은 아닌 것 같아.”
--- p.88

“사춘기가 왜 있는지 알아? 동물은 어느 정도 성장하면 부모 곁을 떠나잖아. 독립을 돕는 호르몬이 나와서 그렇게 되는 거래. 인간도 마찬가지인데 우린 신체 성장이 끝나도 부모 곁을 떠나지 않잖아. 더 오래 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몸에서는 독립하라는 신호를 보내니까 부모 곁에 있으면서도 보호와 도움을 거절하는 사춘기를 겪게 되는 거지.”
--- p.135~136

당신의 산책을 들어 드립니다. 산책은 많은 것을 해결해 줍니다. 신청하는 이유를 적어서 연락처와 함께 메일을 보내 주세요. 당신의 부족한 시간에서 산책할 시간을 만들어 드립니다. 우리는 함께 산책합니다. 당신의 직업이 무엇인지, 돈이 많거나 적은지, 어떤 병이 있고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상관없고 궁금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궁금한 것은 산책하는 바로 그 시간 동안 당신의 눈과 귀와 코와 손으로 무엇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지고 있는지입니다. 그 순간을 나눠 주세요. 그것을 듣겠습니다.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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