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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빨래는 희게 빨고 검은 빨래 검게 빨아

흰 빨래는 희게 빨고 검은 빨래 검게 빨아

파란시선-0088이동
박순원 | 파란 | 2021년 10월 1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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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10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115쪽 | 184g | 128*208*8mm
ISBN13 9791191897050
ISBN10 1191897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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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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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은 갑의 논리가 있고 을은 을의 논리가 병은 병의 논리 정은 정의 논리가 있다 사실 정의 논리는 논리라고 하기도 좀 그렇다 갑 오브 갑은 논리가 필요 없다 정이 어느 날 이걸 꼭 해야 하나요? 되묻는 순간 병이 된다 질적 변화 비약을 하려면 자신을 버려야 한다 얼음이 물이 되고 물이 수증기가 되는 것 철광석이 쇠가 되고 쇠가 철판이 되고 다시 자동차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갑 오브 갑이 이게 왜 여기에 있지? 중얼거리면 이게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긴장한다 갑 오브 갑도 라면이 먹고 싶을 때가 있다 날아가는 비행기에서는 기압이 낮아 병이 정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라면을 맛있게 끓일 수가 없다 그래서 을이 필요하다 을이 을을을 을질을 해 주면 이를테면 비행기 고도를 낮추어 라면을 맛있게 끓이고 다시 올라간다든가 생각을 해 보면 방법이 있을 것이다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이다
--- 「흐르는 강물처럼」 중에서


진주 남강 빨래 가니 산도 좋고 물도 좋아
우당탕탕 빨래하는데 난데없는 말굽 소리
고개 들어 힐끗 보니 하늘 같은 갓을 쓰고서
구름 같은 말을 타고서 못 본 듯이 지나더라
흰 빨래는 희게 빨고 검은 빨래 검게 빨아
집이라고 돌아와 보니 사랑방이 소요터라

진주에 간다 진주성 촉석루 진주냉면 진주비빔밥 「토지」에서 대처였던 곳 박경리가 다녔던 진주여고 성선경은 마산에서 오고 조민은 다섯 시쯤 수업 끝나는 대로 술을 마시겠지 소주 맥주 회를 먹겠지 고기를 먹겠지 진주 진주 진주 같은 도시 진주 남강 진주 남강 빨래 가니 산도 좋고 물도 좋아 우당탕탕 빨래하는데 난데없는 말굽 소리 나는 고속버스를 타고 간다 광주에서 두 시간 사백 리 길 고속버스터미널은 남강이 휘돌아 볼록 튀어나온 곳에 있다 대합실 위층에 서점도 있다 진주고속버스터미널 이 층 헌책방은 신기하고 신기하다

진주에 다녀왔다 성선경을 만나서 어디에나 있는 뼈다구해장국에 진주막걸리 한 통 딱 두 잔씩 나누어 마시고 진주성을 한 바퀴 돌았다 촉석루 의암 논개사당 진주국립박물관 서장대 북장대 외국인 관광객 남강은 잔잔하고 군데군데 깃발들도 잔잔하고 금요일 오후 햇살은 나른하고 벤치에 앉아 커피도 마시고 성선경은 내년이 환갑이다

성벽을 따라가서 인사동 골동품상을 도는데 성선경이 문득 주인을 불러 저 새카맣고 반질반질한 반다지가 얼마냐고 주인은 고리마다 용머리를 새긴 반다지는 흔치 않다고 이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거라고 얼마라고 말하기가 좀 그렇다고 나는 통영 김약국이 만드셨냐고 주인은 김약국을 좀 안다는 듯이 싱긋

진주중앙시장까지 걸어와서 오뎅을 한 개씩 먹고 국물을 한 컵씩 마시고

로타리 커피숍에서 아메리카노 두 잔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다 성선경 웃는 소리 말소리가 카페를 쩌렁쩌렁 울렸다 노트북으로 뭘 하던 여자 주인이 가끔 돌아보았다 리필은 공짜 네 시나 됐나? 호텔에 들어가서 막 엉덩이 붙이려는데 조민한테 전화가 왔다 혁신도시 충무공동 우체국 앞 택시

나주 혁신도시에 한국전력이 있다면 진주 혁신도시에는 LH가 있었다 거대한 LH 틈에서 우리는 대방어 모듬회 다섯 시 반부터 서빙을 한다고 삼십 분 동안 물만 마시며 술도 없이 수다를 떨었다 나는 조민 같은 사람이 무슨 걱정이 있을까 싶었는데 무릎이 아파서 병가 냈다가 복직한 지 일주일 관절염 수술받은 선경이 형 형수랑 필라테스 한의원 도수 치료 꽤 오래 통화를 했다

회는 쫄깃쫄깃 고소하고 달고 소주는 쓰고 맥주는 시원하고

조민 차를 타고 시내를 돌다 강변에 예쁘게 불이 켜진 찻집을 보고 내가 저기 좋지 않나? 했더니 조민이 친구 집이란다 들어가니 색소폰을 연주하고 포도주 발렌타인21 김밥 과일 치즈 계통 없이 펼쳐져 있었다 교감 선생님 유치원 원장 카페 설계한 사람 지은 목수 등등등 조민은 자기 딸 아플 때 많이 도와준 친구들이라고 했다 나는 꿈이냐 생시냐 일단 발렌타인부터 두 잔 따라서 마셨다 그리고 아무 술이나 아무하고나 따라 주고 받아먹고 정신없이 노는데 아뿔싸

성선경이 꾸벅꾸벅 할 수 없이 조민 차에 구겨 넣고 그 와중에 길치 조민이 호텔을 못 찾아 대충 내려주고 갔는데 맥주 네 캔 사서 이리저리 돌다 보니 아주 옛날같이 아가씨들이 유리창 안에서 아직도 이런 데가 있나 한참 쳐다보다가 호텔을 찾아들어 가서 나는 맥주를 홀짝홀짝 성선경은 담배를 뻐끔뻐끔 뭐라고 신나게 서로 떠들다가 잠들었는데

나는 다음에 시집을 내면 제목을 ‘흰 빨래는 희게 빨고 검은 빨래 검게 빨아’로 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아무거나 써 놓고 시라고 우기는 정신 오직 그 정신만이 시를 만든다’ 서문도 써 놓았다고

제목도 있고 서문도 있는데 시가 없네 시가 없어서 시집을 못 만드네 물이 끓는데 라면이 없네

우리는 한참을 웃었다

나는 애면글면 제출한 논문이 게재 불가 반려되고 학교는 내년부터 오십 분 수업한다고 시간표 다 뒤집어엎어 뒤숭숭하고 아내는 백오십 이백 벌 데만 있으면 그냥 청주로 돌아오라고 나는 아무리 둘러봐도 백오십 이백이 어디서 나오냐고

우리는 한참을 같이 웃고 좋은 친군데 조민은 조민대로 성선경은 성선경대로 진주는 진주대로 시름이 깊고 각자각자 살다가 사는 중에 이렇게 만나서 그래 시라도 쓰기를 잘했다

하늘 같은 갓을 쓰고서 구름 같은 말을 타고서 못 본 듯이 지나가는 나쁜 새끼들

나는 우리는 흰 빨래는 희게 빨고 검은 빨래 검게 빨아 맑은 공중에 반짝반짝 널어놓고 잠시 걸터앉아 자기 무르팍을 주무르며
--- 「흰 빨래는 희게 빨고 검은 빨래 검게 빨아」 중에서


그때 나는 군인이었다 양평 20사단 80년에 광주 갔던 그 부대 사단의무근무대 제3중대 여주 62여단에 파견 나가 있었다 상병이었고 행정병이었다 중대장은 전주 출신 신경외과 전문의 도 대위 인사계는 진도 출신 하 상사 전투부대는

봄 내내 충정훈련 장갑차가 앞장서고 앗 앗앗 소리를 지르며 발을 구르며 연병장을 돌았다 도 대위는 창문 너머로 이놈의 군대가 전쟁을 안 하니 썩어서 혼자 중얼거렸다 옛날 광주에 갔다 왔던 인사계는 전투비상과 충정비상의 차이를 설명했다 죽으러 가는 거 아니고 싸우러 가는 거 아니고 의무대는 자리만 지키면 된다고 절대 혼자 다니지 말라고 드디어

진짜 충정비상 서울 모처로 출동 쉬쉬 한양대 한양대 살림살이를 602트럭에 실었다 나는 부대 일지 상황판을 챙겼다 저녁 먹고 어두워질 무렵 여단장 독일 육사 출신 대령이 같이 있던 기보대대 본부중대 정비중대 의무중대 다 모아 놓고 마이크를 잡았다 끝까지 쫓아가지 말고 대열 유지하고 겁만 주라고 우리는 경찰하고 달라서 장갑차 끌고 가서 절도 있게 행동하면 다 도망간다고 내가 견장만 달면 왜 자꾸 사람이 죽냐고 이번에는 죽지 말라고 반말이었는지 존댓말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부대별로 흩어져서

내무반에서 대기 어둠 속에서 차량들이 줄 맞춰 라이트를 켜고 부릉부릉 무전 용어로 달구지 출렁대고 있었다 출동 시간이 한 시간씩 한 시간씩 연기되었다 그날 우리는 전투화를 신고 잤다 자고 일어나 보니 차 시동이 꺼져 있었다 식판 내려서 밥 먹고 씻어서 올려놓았다 점심 먹고는 그냥 두었다 세숫대야 내려서 세수하고 TV 내려서 둘러앉아 보다가 저녁에 모포 내리고 다음 날 매트리스 내리고 간부들은 옹기종기 모여서

출동 확률 70% 50% 30% 일주일을 그렇게 살았다 상황 해제 며칠 후 6.29 선언 별별 설이 다 돌았는데 미군이 서울 가는 길을 미리 다 막고 있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했다
--- 「1987」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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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원 시인은 ‘뉘엿뉘엿’ 시를 쓰고 ‘어리둥절’ 시를 쓴다. 그의 시는 기존의 말의 관습으로부터 자유롭다. “아무거나 써 놓고/시라고 우기는 정신/오직 그 정신만이/시를 만든다”고 선언한다(「시인의 말」). 다른 시인들이 시적(詩的)이라고 주장하는 대상과 의미에 몰두할 때, 그는 “아무거나”로 시를 “만든다”. 시 아닌 것을 써서 시의 외연을 확장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적 관심도 한곳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직장, 우주, 몸, 시사와 과학의 세계까지, 현실을 횡단하는 방랑의 기질로 삶의 안팎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닌다. 풍자와 유머가 번뜩이는가 하면 다사다난한 일상의 풍경과 고단한 생활의 표정이 시 속에 오롯이 살아 있다. 그는 세상이 “더 강력한 비유 향기로운 비유 상쾌한 비유 참신한 비유”를 요구하고 있음을 안다(「비누」). 그러나 그것은 삶과 시에 있어서 그가 걷는 길이 아니다. 그는 오직 “흰 빨래는 희게 빨고 검은 빨래 검게” 빠는 깊고 깊은 근원의 길만 걸을 뿐이다(「흰 빨래는 희게 빨고 검은 빨래 검게 빨아」).
- 송찬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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